미리 써보는 '병역거부' 이유서
― "만국의 불안정한 자들(precariot)이여 연대하라+"
모든 사람은 겁쟁이다. 거기에서는 결기한 자들이 엿보았던 미래를 결기한 자들의 독점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로 간주되는 존재에게서 다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결기라는 힘이 미래를 여는 유토피아의 순간을 만들어 냈다 해도, 그 미래는 겁쟁이의 신체를 매개로 해서 펼쳐져 나가야 한다. 거기에 바로 사상의 역할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도망간 자, 굴복한 자를 평가하려 하지 않는 사상은 그 역할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그것은 결기의 힘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목숨을 건 행동을 포함한 겁쟁이의 연대를 생각하고 싶다. (도미야마 이치로, 『폭력의 예감』, 8쪽).
다큐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 병역거부라는 새로운 선택지
공부밖에 모르던 모범생이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가니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세상은 예전까지 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달라 보였다.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를 다니면서, 상도동의 철거촌 골리앗을 다녀오면서 내 세계관은 근저에서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동안 국민을 지켜주는 존재라 무심코 생각했던 경찰은 이제 나를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분노를 한없이 키워가던 2003년 가을, 김환태 감독의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다큐를 보게 되었다. 다큐가 끝난 뒤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과 김환태 감독, 병역거부자 나동혁 사이에 열띤 대화가 이어졌고, 나는 그날 내내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내가 병역거부자들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된 것이 단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당시 내 삶의 맥락 속에서 그렇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병역거부는 내 삶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군대 문제와 관련한 내 고민에는 이제 병역거부라는 선택지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전쟁없는세상>과의 만남 - “근데 병역거부하는 이유가 뭐예요?”
앞으로 뭐하며 먹고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할라치면 늘 발등에 혹처럼 날 가로막는 것이 군대 문제였다. 대학 1, 2학년 때 학회, 동아리를 함께하며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은 하나둘 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데 나는 아직도 더 놀고만 싶었다. 대학의 수업들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학교엔 갈수록 숨 쉴 공간이 사라져 감을 심각하게 자각하기 시작하던 무렵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후원인들의 모임”이라 불리던 <전쟁없는세상>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병역거부와 관련한 활동을 시작했다.
누군가의 병역거부 소견서에도 언급된 적이 있지만, 나 역시 애초에 평화로워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병역거부를 고민하면서 평화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전쟁없는세상>을 통해 만난 사람들 덕분에 채식을 시작했고, 자전거를 장만했다. 적게 벌고 덜 소비하며 세상에 가능한 해를 덜 끼치며 사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들이 시작됐다. 돌이켜 보면 지금 내 삶의 8할은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내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 계속해서 병역거부 선언을 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나를 늘 사로잡았던 질문은 다름 아닌, 좀 우습긴 하지만, 먼 훗날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는 무슨 말로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소견서들과는 좀 다르면서 여전히 호소력 있고 감동도 줄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왠지 앞선 병역거부자들이 내가 할 말들을 다 빼앗아 가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내 자신의 병역거부를 설명하기 위한 말을 쥐어짜내 보려는 평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근데 병역거부를 하려는 이유는 뭔가요?”라는 질문만 받았다 하면 나는 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쉽사리 열지 못했다. 이런 상황들을 나중에 곱씹어 보며 나는 내가 벙어리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해보았다. 일단, 내가 병역거부를 고민하게 된 이유는 너무 많은데 정작 이것들을 내 언어로 체화하지는 못했기에, 아니면 상대방이 어떤 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느라, 혹은 실컷 말했다가 정작 나중에 가서 감옥에 안 가게 될까봐서 등등. 왜 병역거부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의 내면에는 하고 싶은 말들이 한 보따리씩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입 밖으로 내 말을 꺼내는 것은 늘 버거운 짐처럼 느껴졌다. 징병에 반대하는 것도 맞고, 전쟁반대도 맞고, 평화주의도 맞고, 사회의 위계질서와 폭력적 문화에 대한 거부도 맞고, 탈군사화와 탈군사주의도 맞고, 한반도의 평화 팔레스타인의 평화도 다 맞는 말인데, 이 많은 말 중에 정작 나를 속 시원히 설명해 주는 언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내 병역거부를 당장 내 앞의 타인에게 설명은 해야겠는데 막상 입을 열면 버벅대기 시작하니 스스로도 퍽이나 답답했다.
‘귀차니즘’ - 그냥 군대 가기가 싫은
남성의 병역이행이 더 이상 시민권을 담보하지 않으며, 고용 없는 성장 속에 한 개인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것은 날로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병역거부를 결심하는 것은 경쟁사회에서 이탈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남들에게 특히나 부모님들에게는 쉽게 이해받기 힘든 선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를 선택한 것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속 시원한 나만의 대답은 단지 군대 가는 것이 싫고 귀찮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평화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는 당장 나의 삶이 불안정(precarious)하고 갈피를 못 잡겠는데 군대든 감옥에서든 내 신체의 자유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일정 기간 동안 구속되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싫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병역거부자가 공식석상에서 자기는 그냥 군대 가기가 싫은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의 말은 이내 곧 병역거부와 기피를 구분하는 기존 담론으로 포섭되어 결국은 왜곡된 발화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읽게 된 도미야마 이치로의 『폭력의 예감』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의 난망한 언어부재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실마리들을 던져 주었다.
용감한 비전향자는 늘 역사의 주인공으로 떠받들어지고, 겁쟁이는 배신한 전향자로 극복해야 할 역사의 장해물로 자리매김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겁쟁이에 대한 틀에 박힌 평가 이전에 겁쟁이 자신을 우선 중심에 놓고 싶었다. 겁쟁이의 신체에는 상처, 혹은 상처와 관련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것은 아닐까? (같은 책, 6쪽)
도미야마 이치로는 "모든 사람은 겁쟁이"라고 말하면서 "결기한 자들이 엿보았던 미래"는 "겁쟁이의 신체를 매개로 해서 펼쳐져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겁쟁이들의 신체에는 상처와 관련된 상상력이 흘러넘치고 있으며, ‘폭력’이 ‘예감’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장(武裝)면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언어행위에서는 폭력에 대치하는 언어의 가능성의 임계가 우선 발견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언어행위를 통해 암시되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방어태세를 갖춘(sur la defensive) 자들에 의해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미야마의 이러한 언설들은 병역거부를 결심한 뒤에도 내면으로는 끊임없는 불안과 방황, 자기분열 속에 스스로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말로 다가왔다.
만국의 불안정한 자들(precariot)이여, 연대하라
지난 5월 15일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행사에서 만난 해외의 병역거부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징집영장이 실제로 나오는 것과 무관하게 병역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 CO)라는 호칭을 쓴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영영장이 나오고 병무청에 병역거부 의사를 밝힌 뒤 재판과정을 밟으면서 비로소 ‘정식’ 병역거부자가 되는 한국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라서 나에겐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론 병역거부를 하면 상대적으로 혹독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 한국적 맥락이 있긴 하지만, 영장을 받기 전에도 스스럼없이 CO가 되는 다른 나라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동안 나를 무의식 중에 짓누르고 있던 ‘예비 병역거부자’라는 자기규정에서 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 병역거부를 설명할 때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내 신념을 끊임없이 검열하는 강박관념들이 좀 덜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감이라는 지각에 의해 감지된 폭력이야말로 방어태세를 취하는 상태가 암시하는 폭력이라는 점이다.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혹은 시체 옆이라는 위치에서 폭력을 감지할 때 그는 방어태세를 취한다. 그리고 방어태세를 계속 취하는 한, 감지된 폭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기지의 세계에서 약세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고해야 할 것은 아직 부재하는 폭력의 지금 존재하는 형태이며, 그런 사고에서는 그 폭력은 싸워야 할 상황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압도적 약세의 위치에서 방어태세를 취하는 누군가를, 기지의 폭력으로 압살될 것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존재하게 하는 데에는 그가 폭력과 관련해서 작동시키는 지각이 자유로운 관찰과 계산이 아니라 예감이라는 지각임을 우선 아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같은 책, 63-64쪽)
‘폭력’을 ‘예감’하고 언어의 가능성의 임계지점을 찾아 주의 깊게 말을 엮어 내어 폭력에 저항할 가능성을 우리의 가능성으로 사고하는 것. 병역을 거부하겠다는 결심 이외에는 모든 게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학과 자기환멸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새로운 저항의 상상력의 자원으로 삼고 새로운 언어를 발굴해내는 것. 그리하여 "겁쟁이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
이렇게 정리를 해보지만 그래서 내가 이제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나의 병역거부 이유서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병역거부를 고민한 지 5년이 지난 지금의 내 일상은 어느새 스멀스멀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지만, 병역거부를 통해 시작되었던 내 삶의 지향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이제는 병역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 내 몸을 기술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사유를 전개해 나가고 싶다.
+ 소제목을 비롯한 이 글의 전반적인 아이디어는 지난 4월 30일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있었던 정희진 선생님의 "한미동맹의 변환과 신자유주의를 통해 본 징병제의 성별 정치학 : 변화하는 국가안보 담론과 병역 거부 운동" 강좌에서 빌려왔습니다.
* 평화바닥 회원인 날맹님은 '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 홈페이지에 포스팅된 글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740?category=8
* 웹페이지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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