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염창근] 버마,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

평화바닥 2010. 1. 6. 01:17

버마,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

염창근




“버마인 마웅저 씨와 처음 만났던 때는 2006년 초였다. 아시아의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지인들 몇몇이 작은 친목 모임으로 떠돌면서 만나고 있었는데, 병역 문제로 오랫동안 모임을 나가지 못하다 다시 모임에 참석한 날, 구석진 곳에 그는 앉아 있었다. 모임에 참여한 지 꽤 되었다고 들었지만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이후 계속 모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말은 유창했지만 간혹 묻는 질문에만 대답을 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3년 가까이 시간을 보냈다. 2007년에는 샤프란 혁명이 있었고 2008년에는 태풍 피해가 세계적 이슈가 되었을 만큼 버마에서 큰 일이 생겼지만, 이상하게도 버마 이야기는 잘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내 문제였음을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버마에 관해 들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버마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고, 들을 수도 없었으며, 그도 그걸 애초에 알고 있었기에 별로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버마가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2008년의 가을이 겨울로 넘어가는 때였다. 여러 단체가 공동으로 어떤 축제를 준비했는데 나는 축제의 일부였던 평화마당을 맡고 있었다. 평화마당에는 여러 분쟁 지역의 이야기와 국내의 여러 이슈를 넣고, 축제이니 평화 책, 평화 놀이 프로그램을 곁들이기로 했다. 그때 모임의 한 친구가 마웅저 씨가 하는 ‘버마 어린이 교육 지원 활동’을 넣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버마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축제 날 버마 사람들이 몰려와 부스를 꾸렸다. 그들 대부분은 이주노동자였기에 사정상 이동이 매우 힘들고 조심스러웠을 텐데도 꽤 많이 참여했다. 그런데 설치된 부스와 발 벗고 뛰어다니는 버마 사람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나는 불편해졌다. 축제를 치르느라 정신없이 분주하기도 했지만 한동안 불편함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고, 버마 부스로는 계속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마웅저 씨가 있으니 그래도 신경을 써야 했기에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부스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남루한 옷차림에 해맑게 웃고 있는 버마 어린이들의 사진들과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47년간이나 군사독재의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나라. 20년이 넘도록 의회가 열리지 않는 나라. 평화나 민주주의, 심지어 인권이라는 단어도 모두 금지되어 있는 이곳.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이주, 강제노동, 강제몰수가 군부에 의해 자행되고 어린이들은 강제징병, 강제노동, 성매매를 강요받고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아이가 40%에 이르며 영양 결핍에 처한 아이도 40%에 이르는 나라.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군부가 펴낸 1종 교과서 이외에는 접하지 못하는 곳.’

그동안의 나의 무심함이 내 머리와 가슴을 때렸다. 버마 친구들이 나누어준 유인물에는 ‘한국 돈 2500원이면 버마 어린이 한 명이 한 달 동안 교육을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전쟁과 분쟁 지역에서 현지 사람들과 연대하는 활동을 하는 한국인들은 이와 비슷한 표현을 종종 등장시키곤 하지만, 이번처럼 분명하게 말 그대로 다가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자 불편함의 이유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나의 마음은 조금씩 버마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동안 버마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이들에겐 목소리를 가질 권리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그렇게 버마는 ‘말’ 없이 외면 속에서 살아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대개 버마를 이야기하는 순간 대개 아웅산 수치 여사를 즉각적으로 말하게 된다. 아웅산 수치 여사에게 집중된 버마의 이야기란 쿠데타 군부정권에 의한 정치적 억압 상황으로 간단하게 도식화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나도 그랬고, 3년 동안이나 친구로 동료로 지내면서 겨우 이 정도에서 규정하고 정리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군사정권이든 독재정권이든 식민지배든 이 모두의 합이든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는커녕 자기가 고통받고 있다는 말조차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 여전히 많다. 그래도 제3세계 나라들 대부분은 외부의 개입이든 투쟁으로든 어찌어찌 진전을 이뤄 선거 따위의 형식적 절차라도 있고 권력들은, 설령 변하는 건 하나도 없더라도, 이를 통해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버마는, 정치적ㆍ시민적 권리뿐 아니라 경제적ㆍ사회적 권리 모두를 완전히 박탈당한, 세계에서 최악의 나라를 대표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양지를 찾는 사람들

그러므로 어느 것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어렵기만 하다. 언제나 ‘그늘’의 나라, 자기는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고 설령 낸다 하더라도 들어줄 사람도 없는 곳. 들어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들리는 순간 공개적 처형을 당하고 마는 나라. 이런 처지를 알기에 먼 타국으로 겨우 떠나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조국의 민중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처지는 매한가지였다. 그 처지를 온몸으로 느끼던, 이주자를 위해 일하는 태국의 한 활동가(국경 없는 친구들)이자 저널리스트가 태국으로 떠밀려 온 버마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묶어 냈다. 『양지를 찾는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목소리가 아닌 버마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힘겹게 엮어 내고 있었고,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버마의 목소리를 비로소 만나게 했다.

“내가 1000차트를 벌면 그중 700은 반드시 버마 군대에 내게 되죠.”
“그게 대체 무슨 세금들인데요?”
“기막힌 이야기죠. 세금의 종류가 너무 많아요. 운반세, 철도세, 노동세, 철도세가 그중 제일 비싸죠. ……”
“그럼 돈이 없으면요?”
“버마군 군수 물자 운반에 징용되죠. 그리고 거기에서 맞거나 총살당할 수 있어요. 이들은 전선의 가장 앞줄인 군인들 앞에 걸어가야 해요. 말하자면 인간 지뢰 탐지기거나 군인들을 위한 방패막이인 셈이죠. 그 밖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철도 건설 현장에 징발되기도 해요. 거기에서 역시 매질을 당하고 배급량도 언제나 너무 적어요. 그래서 스스로 음식을 조달해야만 하죠.”
“그런데 그 운반비라는 것이 대체 뭔가요?”
“버마군이 군수 물자나 탄약을 운반시킬 때면 우리가 그 비용을 대야 해요. 아니면 우리가 운반해야 하는 거죠.”
(『양지를 찾는 사람들』, 38쪽)

“초, 거기서 뭘 할 계획이죠?”
“나도 몰라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철도 공사에 징집될까 봐 걱정이에요. 그리고 우리 가족이 굶게 되지나 않을는지. 하지만 혼자 집으로 돌아간 아내가 제일 걱정이죠. 남자가 없으면 여자라도 끌고 가거든요.”
(18쪽)

돈과 물품을 빼앗고 그것이 없으면 사람을 빼앗고 그것마저 없으면 집과 토지를 빼앗는다. 버마 사람들은 아주 적은 수입으로 정부에 온갖 세금과 군 납부금과 기부금 등을 내야 한다. 정부에 판매되는 작물 가격은 턱없이 낮지만 토지세, 주민세, 소득세, 상업세 같은 세금과 노동비, 운반비, 보안비, 소방비, 논 사용비, 가스시설 이용비 등 납부금을 내야 한다. 게다가 도로 건설, 정부 청사 보수, 정부 행사 같은 것에 기부까지 해야 한다. 강제 헌납은 매달, 매년 이루어지고 수시로 발생하기도 한다. 거기에다가 납부금으로 거둔 돈이 있는데도 무임금으로 일도 해야 한다.

특히 소수민족들은 ‘내전과 반군’을 빌미로 내세우는 버마 군대와 항상 마주해야 하고 그들의 강탈과 폭력에 시달려야 한다. 여느 나라에서나 국가의 강제 복무제도가 있지만 버마에서 강제 노동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그래서 그것은 완전히 삶의 일부가 되었고 문제 삼는 사람도 거의 없게 되었다. 시민도 국민도 아닌 단지 부려 먹히는 인부나 노예가 되는 삶을 어찌 봐야 하는 걸까.

“그건 지옥 같은 삶이에요. 산 채로 매장된 느낌이라니까요. 버마 군대 운반 일을 여러 번 했는데 시키면 군대 캠프든 도로든 아니면 다리든 철도가 됐든 뭐든 지어야 해요. 돈은 말할 것도 없고 깨끗한 마실 물조차 얻을 수가 없죠. 그래서 우리 고향에서 우리가 먹을 쌀이랑 식료품을 작업 현장으로 가져가야 했어요. 어떤 때는 군인들이 제멋대로 우리 쌀을 빼앗아가기도 하죠.”
“우리를 노예로 생각하고 군수 물자를 운반하게 했어요. 모든 방식으로 우리를 강제로 착취하고 억압했죠. 그들을 위해 목욕물을 길어다 주고, 캠프의 담을 쳐 주고, 그들의 술안주로 돼지와 닭을 바쳐야 했어요. 게다가 무지막지하게 맞았죠. 버마 군대는 주민들을 군인으로 강제 징병해요. 하긴 다른 소수 종족도 똑같이 징병하지만…….”
(49쪽)

버마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 소수민족은 극심한 유린을 견디다 결국 군부의 군홧발 아래서 살기를 거부한다면 이주를 시작해야 하고 국경을 넘어야 한다. 반란군이 있는 지역의 소수민족 사람들은 곧장 공격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피난이다. 태국 국경 지대로 넘어가는 버마인 대부분은 ‘살 권리’를 위해 존엄하게 투쟁하지만 그곳 역시 착취와 위험으로부터 전혀 안전하지 않다. 브로커와 알선업자와 태국의 사업장 주인과 태국 경찰에 의한 착취 시스템이 ‘잠자고 있을 때조차’ 돌아가기 때문이다. 밀입국 산업, 부채 노동, 성매매 산업, 인신매매업, 인간 무역업은 물샐틈없이 체계적이어서 그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부채를 조금씩 갚으면 경찰들이 정기적으로 체포해 돈을 뜯고 그것이 다시 빚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은 즐비하다. 이주노동자 등록 카드 구입, 노동허가서 신청, 건강검진비, 차비, 임금 체불, 부분 지불, 사기 등으로. 복리후생도 의사소통도 없다. 온갖 종류의 폭력의 위험만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 줄기 빛이라도 찾아 떠나온 이들은 늘 귀향의 꿈을 간직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 다 함께 살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만족했어요. 정말이에요. …… 하루는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 3일 내에 이사갈 것을 명령했어요. …… 우리는 논과 작물을 내버리고 떠나야 했죠. 그들은 우리 마을을 불지르기까지 했어요. 그리고 이주를 거부하면 총으로 쐈어요. 군대가 마을에 남은 사람을 발견하면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총살했지요.”
(56쪽)

“3년 전이었죠. 브로커는 나를 기차에 태웠어요. 도중에 우린 경찰과 마주쳤어요.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경찰이 물으면서 마을에서 죄를 짓고 도주하는 것 아니냐고 몰아세웠어요. 협상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죠. 결국 그가 원하는 건 돈이었어요. 우린 각각 3,000차트씩을 그에게 주었어요. 그 정도면 괜찮은 거예요. 만에 하나 군인이라도 만났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그들은 우리를 철도 공사장으로 데리고 갔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아이들을 포함해 우리 열 명은 트럭을 타고 우리 마을에서부터 몽툰으로 갔어요. 한 사람당 5,000차트가 들었죠. 몽툰에서 국경까지는 다시 150밧을 냈어요. 국경에 이르자 우리는 버마 측 검문소에 50밧을 지불했어요.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여서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죠. 그중에 몽빤에서 마을 사람들과 같이 온 열아홉 살 난 소녀가 있었어요. 한 남자와 우리 마을의 열한 살짜리 소녀와 같이 그녀는 심문을 받기 위해 병사 캠프로 불려갔어요. 남자는 석방되었지만 신분증을 압수당했죠. 열한 살짜리 소녀는 울면서 남자의 뒤를 따라나왔지요. 하지만 몽빤에서 온 소녀는 밤새도록 나오지 않았어요. 걱정이 되었지만 우린 어쩔 도리가 없었죠. 동이 트자 곧바로 그곳을 뜨는 수밖에 없었어요. 소녀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89쪽)

매춘 전담 에이전트는 심지어 여자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팔기도 한다. 여자들은 차 밖에 나와 포주들에게 자신들의 외모를 보여주길 강요받는다. 팔리지 않은 여자들은 팔릴 때까지 돌아다녀야만 한다. 쉽게 팔리지 않는 여자들의 가격은 계속해서 내려가 나중에는 끼워 팔기의 형태로 거의 공짜로 주다시피 한다. …… 이주 노동자들은 선택할 권리도 의사를 표명할 권리조차 갖고 있지 않다. 모집원들은 사탕발림 같은 말로 사람을 현혹할 뿐 이동이나 노동 조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일체 없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이전트 경비를 선불하거나 도착 후 바로 낼 수가 없다. 경비를 부채로 전환하면서 에이전트는 이자율에 대한 설명도 없이 100퍼센트의 이자를 물린다.(101~102쪽)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10,000밧이 넘는 빚을 진 상태가 되었죠. 딸의 몫까지 합치면 25,000밧이나 돼요. 그러니 언제 고향으로 돌아가겠어요? 처음에 합의한 3,500밧이라면 갚아보겠지만 이젠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늘어나버렸어요.”
(107쪽)

결정판은 어린이 강탈이다. 버마 군대는 마음대로 어린이들을 데려가 소년병으로 부려 먹거나 성적 목적으로 이용한다. 마약을 배달하게 하거나 성매매를 하게 한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든 없든 전혀 상관없다. 이들의 가족은 자식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도 모른다. 반군 소탕을 명분으로 남자를 강제로 징집해 가지만 특히 어린이들은 손쉬운 징집 대상이 된다. 군인이 제대를 하려면 몇 명의 아이들로 대신 군대에 채워 넣어야만 하는 관례마저 있을 지경이다. 태국으로 떠나온 많은 어린이들 가운데 소년들은 나이에 적합하지 않은 위험한 일을 감당해야 했고 소녀들은 성매매업에 인신매매되었다. 성매매 업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많은 버마 출신의 여성들은 열여덟 살도 안 된 나이에 일을 시작한다.

“저는 두 번이나 임신했어요. 주인은 제가 낙태하도록 강요했어요. 그는 꺼따웅에서 한 여성을 데리고 와서 낙태를 하도록 했어요. 저는 겨우 며칠 동안만 쉴 수 있었고 다시 일을 해야만 했어요. 제 임금은 물, 전기, 이민국 경찰의 차 값, 낙태 수술 때문에 줄어들었고, 그래서 남은 게 별로 없어요. 저는 다섯 번 체포되었었고 항상 주인은 경우에 따라 1,000밧 혹은 3,000밧을 내고 저를 꺼내왔어요. 그리고 그는 다시 그 비용을 제 임금에서 삭감했어요. …… 저는 한 번 도망친 적이 있지만 잡혀서 구타당했어요. …… 그 이후 그는 더는 제가 어딘가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어요.”
(175쪽)

공공 보건과 교육은 경악할 수준이고 구성원들은 반복되는 이주, 일상적인 분리,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지쳐가고 사회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만성이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얼마간의 자유라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이조차 대부분의 버마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장기간 군부의 지배하에 자유 없이 살아온 많은 평범한 서민들은 신체적 고통과 함께 깊은 피로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버마가 소속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과 세계 국가들은 버마의 내정 문제일 뿐이라며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버마는 암흑의 땅이 되었지만 종족을 불문하고 버마 사람들은 계속해서 양지를 찾아 투쟁하고 있다. 이들은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평화와 자유의 뿌리가 무엇이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오히려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노력 없이 이러한 것들은 성취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암담함 속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나의 의문에 일침을 가했다.

마웅저 씨는 이미 2002년부터 다른 버마 사람들과 함께 ‘버마 어린이 교육을 지원하는 이주민의 모임(APEBC)’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버마 내 절(寺) 학교와 태국 메솟의 난민촌ㆍ이주촌에 있는 작은 학교들에 지원해 온 것이다. 이 사실도 나는 이날의 유인물을 받아 보고서야 알았다. 그동안은 이런 난민촌ㆍ이주촌의 아이들에게 배움은 사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꽤 많은 학교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태국 내 NGO들의 목숨 건 싸움으로 조금씩 태국 내 인권 유린도 줄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도서관을 만드는 꿈을 꾸고 준비하고 있다. 참 많이 늦었지만 목소리를 가질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손이라도 내밀 용기가 생겼고, 다행히 마음이 이어져 ‘버마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작은 모임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31일에 ‘버마행동’이라는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단체에서 후원 행사를 열었다. 몇 십 명의 한국 사람들이 비가 왔음에도 찾았고 열심히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행사가 파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술 마시는 것밖에 할 게 없었지만 버마 친구들은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이 음지의 사람들의 외로운 투쟁에 내미는 손길은 아직 너무나 적었다. 작년에 첫 버마인 난민으로 인정받았던 마웅저 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여권으로 오늘 태국 여행을 떠났다. 친구를 만나고 싶어 없는 돈을 쪼개 한 달간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10년 넘게 한국에서 싸워 왔지만 여전히 외로울 수밖에 없는 그가 친구들을 만나 앞으로도 희망을 계속 말할 수 있기를 마음속에서나마 기원해 본다.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 블로그에 포스팅된 글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822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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