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염창근] H에게 - 라말라에서 보내는 편지

평화바닥 2010. 1. 8. 01:58

H에게 - 라말라에서 보내는 편지

염창근




△ 라말라의 중심에 있는 알 마나라 광장의 시장 거리


빨리 소식 보낸다고 했는데 많이 늦었지? 예정한 짧은 여정 동안 팔레스타인을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만나고 싶어 도착하자마자 촘촘하게 일정을 잡고 움직이느라 조금은 무리하면서 돌아다녔어. 그래서인지 함께 간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의 몇 선생님은 가벼운 몸살을 겪기도 했어. 하지만 그만큼의 큰 의미도 함께 주고 있는 것 같아. 이번 여행은 팔레스타인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것이었지만 나에겐 교류 이상의 배움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할까? 시선이 가닿는 하나하나가 간절히 보고 싶었던 그 자체였으니 사소한 것에도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어.
네가 언젠가 이곳을 다녀온 후 날마다 이곳 이야기를 내게 해 주었을 때처럼 나도 전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리해서 말하기가 쉽게 되지 않아 답답해지기도 해. 그래도 타국의 여행자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도 늘 환대해 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마음의 무거움을 느끼기보다 타지 생활을 하다 포근한 고향에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안락함을 먼저 느끼게 돼. 누구나 한번쯤 들었을 세계적 분쟁 지역인 이곳에서 느끼는 이런 묘한 마음을 너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을 하게 돼.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래서 더욱 많이 남아.

검문과 군인만 없다면

말로만 듣고,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이곳 이야기를 실제로 몸으로 마주했던 그 순간은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정말 수도 없이 들어왔던 검문소와 통제 문제는 여기에 입국하는 일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견고한 벽으로 다가왔어. 터키 이스탄불 공항에서 환승할 때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군인들의 검문과 심문은 굴욕적으로 다가왔지만 이 모든 것을 참아야지만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기에 모든 절차를 순순히 감내할 수밖에 없었어.
마침내 텔아비브의 벤쿠리온 공항의 검문마저 넘어 이스라엘의 공기를 처음 마셨을 때는 자유의 기분마저 느껴질 정도였지. 지금 돌아보면 매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에 가는데 그토록 긴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아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미지화된 나의 상상이 굴레처럼 마음을 묶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팔레스타인 친구가 미리 준비해 준 승합차를 타고 공항에서 곧장 이스라엘을 가로질러 팔레스타인 서안의 라말라로 들어갔을 땐 예상했던 대로 갑자기 다른 세계로 들어왔고 공간은 순식간에 변화했어. 이스라엘이 잘 정돈되고 여유로움을 느끼게 했다면 팔레스타인 지역은 좁고 무질서하면서도 따뜻한 옛날의 도시를 떠올리게 했어. 두 공간의 선명한 대비는, 표지판이나 간판들이 히브리어에서 아랍어로 완전히 대체된 것처럼 깊은 간극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아.
그러나 그 선명한 분리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두 공간 모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어. 도대체 여기가 오랫동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던 분쟁지역인가 싶을 만큼 삶의 활기가 넘친다고 할까? 어떤 아이러니 같은 것마저 느꼈다고 하면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서울의 사람들에 찌든 삶의 피곤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어. 다른 목표는 없고 사회 전체가 오직 돈벌이만을 위해 분주히 움직여야 하는 그런 피곤함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기운이 넘친다고 할까? 이스라엘이야 빼앗은 자의 오만이 그 활기의 핵심에 자리해 있지만 라말라는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어. 빼앗기고 고립된 자의 고통과 좌절이 아닌, 마치 희망 가득한 움직임처럼 보였어.  
자신의 뜻대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군사적 길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스라엘 모습은 점령자의 폭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울화통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지만, 라말라의 그 활기는 뭐라고 해야 할까? 한동안의 당혹감은 어쩔 수가 없었어. 검문소와 군인들만 보이지 않는다면 여기가 분쟁지역이라고 느끼기가 더 어려울 것만 같을 정도였지. 새로운 부흥을 위해 팔레스타인 사회를 일구려는 것처럼 보였어.

라말라의 번성, 그러나 …

그러나 곧 활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어.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이를 좋지 않은 변화라고 이야기하며 썩은 미소를 숨기지 않더라. 빼앗긴 땅에서 살긴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늘 활기를 잃지 않았는데, 지금의 활기는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고. 이런 분위기는 아주 최근에 생긴 것이라고 해.
작은 도시지만 서안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라말라는 올해부터 돈이 몰리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돈에 매몰되어 간다고 해. 그에 따라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경제적 발전이 일고 있는데, ‘돈을 벌려면 라말라로 가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라고. 라말라 곳곳에는 날마다 새로운 건물들을 짓기 위한 공사가 있고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들과 주택들로 작은 도시는 점점 커지는 중이었어. 우리가 숙소를 있는 곳도 라말라의 주변부인데 온통 새로 지은 예쁜 주택 건물들이 언덕을 빼곡이 채우고 있어. 중심가와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가난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가고 새로운 상점들이 더욱 화려하게 열리고 있어.
새 건물이 서고 시장이 북적거리는 그 자체를 두고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 배경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어. 올해 초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으로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을 규탄했고 유엔도 전쟁범죄가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유럽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팔레스타인에 줬어. 그러나 그 돈은 가자로 가지 않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있는 라말라로 왔는데 덕분에 라말라는 갑자기 부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해.
이는 이스라엘의 분리-고립 정책을 바꾸게 하지도 않았고 가자를 포함해 팔레스타인 전체의 발전이나 변화와도 무관한 것이었어. 단지 자치정부가 있는 라말라만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잘라 말해.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어. 지금의 라말라는 다른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과 완전히 다르며 라말라에서는 팔레스타인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네가 지금의 라말라에 온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해.


△ 라말라 시내 새로 들어선 상업 건물들

△ 아름다운 언덕 위에 세워지는 예쁜 고층 주택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아. 아니, 빠져들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야. 이름에도 담겨져 있지만 팔레스타인 서안은 온통 크고 작은 언덕과 구릉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땅. 그 위로 구름을 품고 펼쳐진 맑고 높은 파란 하늘은 참 인상적이야. 굽이굽이 언덕을 따라 집들이 서 있고 거리마다 올리브 나무가, 집집마다 오렌지 나무나 레몬 나무가 있어. 겨울인데도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고양이들은 말 그대로 캣워크를 하며 천천히 지나다니곤 해. 그림 같은 아랍어 문장이 낙서처럼 그려진 거리의 벽들, 때때로 울려 퍼지는 모스크 아잔 소리, 순교한 이를 기리는 포스터들이 여기가 어디인지 환기시키지만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며 잡담을 나누고 바삐 오고가는 이들도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라곤 조금도 없는 듯 ‘웰 컴’하며 먼저 인사를 해. 이국의 음식이라면 조금씩은 있는 이질감조차 전혀 거스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이곳 음식과 매혹적인 색감들을 만난다면 더욱 그러하겠지.
밤하늘에는 별이 빛나는데 한국과 똑같은 별자리들이 펼쳐져 있다는 것도 새삼스레 신기하기도 했지. 단절되지 않은 세상의 연결성이 느껴지고 같은 세계, 같은 하늘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 몇 가지 화두를 들고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지만, 이런 화두에 대한 풀이보다도 일단 마음을 열고 팔레스타인을 마주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 화두야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고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으로 계속 다녀보고 있어.
처음 팔레스타인에 들어섰을 때 함께 간 한 선생님이 혼잣말을 던졌어. “내가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오다니!” 그 마음을 이 여정의 마지막까지 간직하며 마주하려 해.  

2009. 12. 11
라말라에서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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