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임유진] 영화 「레인」으로 보는 권력의 작동방식

평화바닥 2010. 2. 25. 13:28

 

영화 「레인」으로 보는 권력의 작동방식


임유진



<영화 「레인」의 한 장면 _ 어려서부터 보아온 자매들을 달래주는 건 언제나 아줌마의 몫.>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무조건 다 괜찮다고 말하는 아줌마가 있습니다. 월급을 못 받아도, 사람들한테 무시당해도 결코 화내는 일이 없는 아줌마. 본 지가 꽤 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프랑스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해서(무슨 상관이라고...-_-;;) 아줌마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아녜스 자우이의 오래간만의 신작이었던 「레인」. 엄청난 대사를 쏟아내는 인물들 속에서 무채색으로 빛났던(시적 허용, 해주실 거죠?ㅎㅎ) 아줌마는, 다름 아닌 주인공 자매의 집에서 살림을 해주는 가사도우미 아줌마이십니다.

인상깊게 봤는데도 이름을 몰라서 심히 죄송스럽습니다만(불어라서 그래요→계속 프랑스영화 핑계-_-) 아무튼 그 아줌마와, 「레인」의 주인공인 성공한 페미니스트 아가테 빌라노바의 대비는 꽤 극적입니다. 남성중심사회의 권력구조를 바꾸겠노라고 정치에 뛰어든 극렬 페미니스트 아가테의 사는 방식은 뭐랄까, 참 남성적인 반면, 페미니즘이고 권력구조고 난 그런 거 몰라~하면서 사는 이 이민자 출신의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사는 방식은 거의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이 아줌마는 아예 권력구조 자체에 들어가질 않거든요.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1)이민자에, 2)가난하고 3)배운 것도 없고 4)남편한테는 맞고 살았던 ‘여자’인 가사도우미 아줌마는 여러모로 참 힘(=권력)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권력’이란 게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죠.) 어쨌거나 참 힘없어 보이는 이 아줌마, 등장인물 중 권력이랑 제일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아줌마가 어쩐지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_=? 자유, 그건 권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 아니었던가요?!?

“권력에 대한 찬탈이 아니라 권력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이 과제를 위해서라도 권력의 작동양상을 알아야 한다.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서의 권력을 안다는 것, 그것은 권력 없는 삶이 아니라 권력의 배치와 작동방식을 바꾸는 삶에 대한 꿈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8쪽)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 이수영 선생님은 권력은 소유하거나 뺏거나 가지거나 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권력은 돈 많은 재벌이, 정치인이, 대통령이, 교수님이, 남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들에게 있는 권력을 빼앗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구요. 그러나 이수영 선생님 말마따나, 권력은 사물처럼 누가 소유하고 넘겨줄 수 있는 그런 실체가 아닙니다. 촛불집회 때 현장에서 느끼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청와대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권력’이, 현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고 작동하면서 완전히 다른 권력장(場)을 만들어 내지 않았습니꺄....(맞..맞죠?)!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권력에 대한 개념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속해 있는 권력의 배치에서 벗어나는 일은 「레인」의 가사도우미 아줌마처럼,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운 일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섭니다. 호호.

국가의 전복만이 권력의 편제를 바꿀 수 있다는 진부한 상상력밖에 없었던 페미니스트 아가테 빌라노바는, 사회적 불의, 비민주성, 일상관계의 모든 억압적 성격을 남성권력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가테는 그 권력의 입구를 찾지 못하고, 사랑도 잃고, 암튼 그러죠. 왜냐하면 권력은, 아가테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인들 사이에, 남성들 사이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말처럼, 권력은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옆에서, 즉 초월성이 아니라 인접성에 의해 ‘작동’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권력은 ‘존재’하기보다 ‘작동’한다. 내 앞에 있는 관료와의 사이에서, 내 앞에 있는 여성과의 사이에서. 매 순간 겪는 권력 관계를 변이시키지 않고서는 삶의 어떤 배치도 바꿀 수 없다. 이런 삶의 배치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초월적인 중심은 없다. 그런 혁명은 성공한 적도 없고, 성공한다고 해도 삶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44쪽)

영화 「레인」의 가사도우미 아줌마의 아들 카밀은 호텔에서 일하는 종업원입니다. 이민자인 데다가, 가난하고, 직업도 좋지 않습니다. 사회가 불만이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자신의 엄마에게 월급도 주지 않고 막 대하기까지 하는 두 자매가 밉고 싫습니다. 두 자매가 엄마에게 제대로된 처우를 보장해 주지 않는데도 늘 “괜찮다”라고 말하는 엄마를 보며 답답한 마음에 오히려 화를 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이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정말로 괜찮아 보인다는 건데요...-_-;; 그냥 겉으로 참고 속으로 화내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월급을 주지 않지만 옆에 창고 같은 집에서 살게 해주었고, 때리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어려서부터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며 지켜보았고…등등. 그러니까 이 아줌마는 주인-종업원의 관계, 엘리트-못 배운 여자, 좋은 집안-이민자 등등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누구라도 신경쓰고 얽매일 그 권력관계, 그 배치에 끄달리지 않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사회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창조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아줌마. 저는, “근대적 권력의 배치 속에서의 삶이 자신의 삶을 파행으로 몰아갔다면 적극적으로 새로운 삶으로의 변신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수영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 가사도우미 아줌마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고 하면 너무 나아간 해석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권력의 작동방식’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다시 뜯어보니, 조금은 지루했던 이 영화가 새삼, 재밌게 느껴집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일상과 관계를 장악하고 있던 ‘권력’. 권력은, 우리가 아는 만큼, 우리가 제대로 작동시키는 만큼 우리 삶을 꼬물꼬물(?) 바꿉니다.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임유진님은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의 블로그(http://greenbee.co.kr/blog/)에 포스팅된 것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842?category=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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