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평화바닥 날맹] 작은도서관에서 꾸는 평화의 꿈

평화바닥 2010. 2. 11. 02:00

 

작은도서관에서 꾸는 평화의 꿈



날맹



  
<리버풀 도서관>


리버풀 도서관의 추억


작년 여름 2주간 영국 여기저기로 여행을 다닌 적이 있었다. 런던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출발해 다음 날 아침 에딘버러의 상쾌한 공기를 맞으며 여행의 첫 단추를 끼웠다.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둘러본 뒤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서 잉글랜드 북부의 호수 지방, 리버풀, 체스터를 거쳐 브리스톨까지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는 대략의 동선만 짠 채 자전거에 텐트랑 코펠을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여행에 익숙했었고 예측불가능성도 여행의 하나의 묘미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영국 여행을 준비하면서도 버스 동선만 정하곤 숙소 예약은 전혀 하질 않았었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던지 리버풀에 도착하여 미리 봐놨던 숙소들을 찾아가니 마침 그때가 축제 기간이라 방이란 방은 모두 다 나갔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밤늦은 시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바람도 덩달아 스산한데 당장 오늘 밤 따뜻하게 잘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에 꽤나 당황했고 불안했다.

결국 밤 12시가 다 되었을 즈음 이웃 도시에서 숙소를 가까스로 찾아 그날 밤은 해결했지만 그 다음 날 숙소가 또 다시 문제였다. 리버풀에 왔으니 계획했던 대로 이틀간 머물면서 비틀즈의 흔적들을 둘러보고 테이트 리버풀 미술관에도 가보려면 당장 더 묵을 싼 숙소를 찾아놓아야만 했다. 일분일초가 아쉬웠지만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정을 포기하고 아침부터 숙소 검색을 위해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내가 찾아간 리버풀 도서관(Liverpool Central Library)은 리버풀 시내 한가운데에 있었다. 영국의 다른 여느 공공도서관들처럼 이곳 역시 출입에 특별한 제한이 없으며 인터넷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자료 열람이 자유로운 것은 물론이고 대출 서비스는 나 같은 외국인도 여권과 주소지를 증명할 수 있는 아무 서류(예를 들어, 가스비 납부고지서)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등록할 수 있었고 이용도 가능했다.

당장 급했던 숙소 예약을 마치고 나서도 나는 리버풀에 머무는 내내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을 찾아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혼자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차분해지는 기분이 좋기도 했고 무엇보다 도서관이 시내의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어서 다른 곳을 둘러보다가도 언제든 돌아와서 편히 앉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을 여행할 때의 긴장감을 잠시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곳, 이것이 내게 각인된 리버풀 도서관의 인상이었다.


맥도널드보다 더 많은 도서관


리버풀을 떠나 호수지방의 앰블사이드, 체스터를 거쳐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브리스톨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어느새 다른 곳보다 먼저 그 지역의 도서관부터 찾아가는 습관이 생겼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가 넘어가면서 슬슬 여기저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귀찮고 피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행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아 펼치면 가볼 만한 곳은 많았지만 딱히 나를 잡아끄는 곳은 점점 줄어만 갔다. 함께 돌아다니며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했다. 내가 그 지역의 도서관부터 찾아가는 버릇이 든 것도 아마 리버풀 도서관에서 맛본 포근함이 계속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유럽여행을 할 때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새로운 도서관을 만날 때마다 얻는 즐거움과 편안함이 더 좋았던 것 같다.

한국에선 어딜 가든 따라다니는 주민등록번호가 지겨웠던 나에게 영국 도서관의 매우 간소한 등록절차는 너무나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 같은 외국인 여행자도 아무 무리 없이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물론 외국인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공공도서관이 ‘불법’체류자들까지 포용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서울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울의 도서관 이용을 제한하는 한국의 시스템보다는 훨씬 더 열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이런 도서관들이 우리에게는 얼마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도서관을 찾지 않는 이유는 대개 집 가까이에 도서관이 없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만 해도 60 남짓한 도서관들이 긴밀하게 연계되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독일에는 걸어서 10~15분 거리마다 도서관이 있고, 영국에도 주택가에는 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이, 상가에는 상인들을 위한 도서관이 즐비했다. 가까운 일본에는 동경 시내에만 350개가 넘는 공공도서관이 있다. 미국 전 지역에는 1만 5,000개가 넘는 공공도서관이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햄버거 체인점인 맥도널드 점포가 1만 2,000여 개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국을 통틀어 겨우 700여 개뿐이다.
(『유럽 도서관에서 길을 묻다』,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지음, 26쪽)

2주간의 여행뿐만 아니라 10개월간의 영국 체류 기간 동안 그곳의 도서관들을 들락날락하며 내가 또 느낀 것은 도서관의 수월한 접근성과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이었다. 한 예로,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크고 소장자료를 다 꼽으려면 625km 길이의 서가가 필요하다는 영국 국립 도서관(British Library)은 런던에서 가장 많은 지하철 노선이 겹치는 교통의 요지인 킹스크로스에 바로 붙어있다. 사실 국립도서관의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을 도서관의 접근성일텐데, 내가 가 본 도서관들은 하나같이 다 그 동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서관에서 지역주민들이 단지 책만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기획하는 전시회를 비롯해 지역사회와 연계된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일상에서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 사람들보다 왠지 더 여유가 있어 보였던 것은 단지 내 눈에 낀 콩깍지 탓이었을까?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해도 그 동네 사람들은 파업노동자들의 입장을 왠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을 가졌을 것만 같았다.


거대한 독서실이 된 한국의 공공도서관


영국에서 그렇게 도서관과 친해져서 한국에 다시 돌아오니 이 땅의 도서관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런던에 머물 때 집에서 걸어 5분 거리에 있던 도서관에 익숙해져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보니 상황이 너무나 암담했다. 생각날 때마다 언제든 쉽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이 전혀 없다 보니 도서관을 한번 찾아갈라치면 꽤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  

한국에선 운이 좋아 자기가 사는 동네에 도서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은 정말 하루 날을 잡아서 방문할 시간을 쪼개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열심히 도서관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철과 일터와 잠자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에겐 낮 동안에 일 하는 곳 근처의 도서관이라도 이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국의 공공도서관은 이용자의 주소지가 해당 도서관의 관할 지역에 속하지 않으면 도서관 이용을 제한하고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내가 영국에서 보았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마실 드나들 듯 그 마을의 도서관을 자유로이 이용하는 모습을 한국의 공공도서관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현재의 도서관은 사람들의 취업 준비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독서실이 되어버렸다. 지금 사회를 지배하는 시장주의는 도서관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이 되어 도서관 이용자의 수요를 존중한다는 논리 속에 갈수록 인문서적보다는 실용서적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관한 책들이 잘 읽히는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각박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 사회적 연대 따위의 가치들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광장’이 사라져 가는 세상에서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교류 속에 다양한 가치들이 경합하는 민주주의의 장을 만드는 것은 굳이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 도서관이 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 방망이는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서관이 단순한 독서실로 전락하여 사람들이 경쟁사회로 편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다면 그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화도서관 건립모임’에 나가게 된 것은 이런 문제의식들 때문이었다.

  
<거대한 독서실이 된 공공도서관>


도서관이 마을을 만들고, 마을이 평화를 만든다


일상에 쫓기다 보면 책 한 줄 읽는 것도 쉽지 않고,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이상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행복한 청소부』에서 청소부는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며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가 닦는 표지판의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을 단순한 소망이나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적인 일로 머물지 않게 만든 것도 도서관이다. 세상의 온갖 지식과 정보가 가득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은 자신을 발견하고 꿈을 키워나가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같은 책, 236쪽)

한 인간의 성장을 도모하는 데에 독서만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른 방식의 경험이 책 한줄 더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자극을 줄 때도 많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를 찾아가 그곳에 수감된 병역거부자들을 처음 만나본 것은 독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 몸을 총체적으로 흔들어 놓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별개로 한다면 보통의 경우에 독서는 그 개인의 안목과 감수성을 키워주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을 상대화해서 바라볼 수가 있고, 그만큼 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 삶의 무게와 고통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게끔 몰아가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약육강식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자기 목구멍부터 먼저 챙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것도 돈이 없으면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세상이다.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고 공감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다니, 이처럼 우울한 일도 없다.

평화도서관은 자본과 국가로부터 벗어난 커뮤니티로서의 마을을 지향한다. 각 개인이 가진 다양한 배경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음으로써 도서관 자체가 다양한 지향과 가치가 교류하는 공간이 된다. 도서관이 하나의 커뮤니티가 될 수 있다면 도서관에서 단지 책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지역을 넘어 사회와 연대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게 책이든 아니면 사람을 만나는 것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위안을 얻고 기운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이 주변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에 큰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든 찾아가도 열려 있는, 내 혼자만의 깜냥으로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도서관을 만들어 보고 싶다.

  
<순천의 작은도서관들 풍경 _ 작은도서관의 도시, 순천의 낙안읍성 작은도서관, 기적의 도서관, 풍덕 글마루 작은도서관의 풍경이다. 이밖에도 아파트나 마을회관, 주민자치센터 등 마을 곳곳에 있는 40개가 넘는 작은도서관들이 운영되고 있다>


* 평화바닥 회원인 날맹님은 '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 홈페이지에 포스팅된 글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897?category=8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