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염창근] 기억과 공간을 잇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평화바닥 2010. 2. 18. 12:18

[팔레스타인을 다녀와서 ②]

기억과 공간을 잇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염창근




점령의 역사를 모른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을 알아야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겉만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모습만으로도 족하다고 할 때가 있지만 그건 과거가 중요하지 않거나 과거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과거를 잊고자 할 때의 이야기다. 더욱이 큰 아픔의 기억을 간직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반드시 그 과거를 나누지 않으면 그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땅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다. 땅은 긴 세월 기후와 날씨의 변화를 맞이하며 자신의 모습을 만들었고 흙과 돌로 풀꽃과 나무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흙과 돌로 집을 짓고 밭을 가꾼 수많은 인간이 돌아가며 그 땅을 일구는 동안 그 인간들과 함께 숨 쉬면서 묵묵히 그리고 고고하게 그 자리에 있던 공간 자체가 땅이다.
팔레스타인의 땅에는 올리브나무들이 서 있고 겨울에도 오렌지가 영글며 돌로 지은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 땅의 풍경은 오랜 세월을 걸쳐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의 기억과 그들이 살아낸 고난과 희열의 기억과 분리할 수 없이 이어져 있다. 그 땅이 파괴된다는 것은 과거를 송두리째 사라지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폭격을 당한 사람들의 아픔은 폭격으로 파헤쳐진 대지와 터전과 풍경과 직접적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그러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에 대해 아무런 역사도 모른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땅의 파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 땅에 그어진 수많은 경계들과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 자체가 폭력적 파괴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그대로 묘사했다. 접근 금지의 위압적 분위기를 뿜어내는 통제 시스템은 팔레스타인 공간 말살 작업이자 일종의 과거 지우기였다.  



▲ 동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점령촌들. 아름다운 팔레스타인 언덕의 숲을 없애고 마루에 점령촌들을 지어 점거하고 있다. (사진=염창근)



예루살렘, 밀려나는 팔레스타인 도시에서 살아내다

팔레스타인 친구들은 우리가 예루살렘을 갈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곤 마치 옛 연인이라도 떠올리듯 그리움을 담아 예루살렘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친구들이 짧게는 몇 년씩, 길게는 십 몇 년씩 예루살렘에 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예루살렘이 고향인 사람도, 그곳에 가까운 친지가 있는 사람도 그곳을 떠나온 후로는 다시는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의 과거가 가장 집약된 공간이며 가장 섬세한 기억을 지닌 공간이기에 예루살렘 가는 길은 적잖이 설렘을 주었다. 그러나 라말라에서 겨우 20분 거리의 예루살렘을 가는 일은 먼 여정을 채비하는 일과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20분 거리를 단절시키는 칼란디아 검문소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40분가량의 시간을 더 들였다.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로 된, 딱 보기에도 삭막하기 그지없는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쇠파이프로 된 통제용 회전문을 일렬로 4번이나 지나야 했고, 그러는 동안 검색대에 짐을 통과시키거나 검색을 당하고,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군인에게 신분증을 전한 채 갖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도시 단위로 고립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있었다. 장벽이었다. 검문소 인근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장벽은 사실 라말라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도시들 하나하나를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치고 있었으며 도시에서 나오려면 오직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가능하게 해 놓았다. 라말라에서 나와 동예루살렘을 가는 동안에도 장벽들은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졌다.
마치 거대한 감옥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이 오직 면회실을 통해서만 외부와의 만남을 허용하듯 장벽 속에서 외부로 나오려면 반드시 검문소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검문소가 문을 닫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멈춰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좁다란 샛길과 골목길을 돌고 돌아 몇 배의 시간을 더 들여야 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예루살렘은 역사 속의 도시를 증명하듯 장관이었지만 감옥이긴 마찬가지였다. 뉴시티는 완전히 유대인의 도시였고, 올드시티와 동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점령촌들로 가득했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지역으로 유대화했고 그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이 간수처럼 사방팔방 상주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땅이었기에 이 도시를 장악하는 과정은 팔레스타인을 밀어내기 위한 조직적 작업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국가 창설을 선언하자 나끄바 즉 대재앙이 일어났고, 이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점령했으며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격해 들어가 예루살렘 서쪽(서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전체 마을의 50%가 넘는 531개의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땅과 재산을 강탈했다.
1967년 6월 전쟁에서는 예루살렘을 포함해 나머지 22% 땅마저 점령해 팔레스타인 전체를 점거했다. 곧바로 이스라엘 의회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도 선언했으며 예루살렘 장악 계획이 본격화되었다. 계획의 핵심은 예루살렘 지역에서 이스라엘 점령촌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예루살렘 시 경계를 크게 만들었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축소시켜 나갔다.
올드시티에서만 6천 명을 추방하고 토지를 몰수해 유대인 지구를 만들었으며 자기들 민족의 상징인 ‘통곡의 벽’ 앞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135채의 팔레스타인 주택을 쓸어버렸다. 그런 다음 아랍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예루살렘 내부와 주변에 이스라엘 점령촌을 집중적으로 세웠다. 점령촌은 동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내부에서 균열을 가하는 전위대가 되었다. 예루살렘 내외부에서 점령촌을 건설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지리적으로 확장시킨 작업은, ‘예루살렘의 유대화’와 ‘인구 비율상의 우위’라는 목표 아래 자행된 집단적 폭거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향후 국제적ㆍ정치적 문제들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계산된 정책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되거나 봉쇄되었고 아랍 사람들은 터전을 잃어야 했다.


▲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유대민족의 상징인 이 벽 앞에 광장을 만들기 위해 이스라엘은 135채의 팔레스타인 주택을 쓸어버렸다. (사진=염창근)

그렇게 예루살렘은 유대화되어 있었다. 올드시티 주변에는 솟아오른 이스라엘의 현대식 빌딩들이 예루살렘을 잠식하고 있었다. 올드시티 내에도 동예루살렘에서도 이스라엘 군인들은 총을 들고 포인트를 점하고 있었고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은 거침없이 현재진행형이었다. 거리에는 유대인들이 통제받는 팔레스타인들 사이로 보란 듯이 떠들며 돌아다녔다.
이제 예루살렘은 서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봤던 기억 속의 예루살렘이 아닐지도 모른다. 들어선 이스라엘 건축물들로 터전은 파헤쳐지고 옛 풍경은 사라져 더 이상 예전의 도시가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한된 아랍 지역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며 상품을 파는 꼴로 전락해 버린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식민지 시민이라는 굴욕을 받더라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만 같았다. 비록 관광객에게 상품을 파는 행위로 먹고 살지만 수많은 외국인을 향해서 팔레스타인이 담겨진 의상과 물건들을 내밀고 있었다. 점령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 땅을 빼앗기는 현실에서 어쩌면 그것보다 팔레스타인의 영혼을 지키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저항하는 몸짓은 감추어진 채 드러나고 있었다.


▲ 비록 관광객에게 상품을 팔며 살아가지만 점령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염창근)


잘라존,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다시 마을을 만들다

잘라존은 라말라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난민촌. 이스라엘 초기에 팔레스타인 마을들이 통째로 파괴되면서 주민들 전체가 난민이 되었고 결국 유엔난민기구와 주변 팔레스타인 도시들의 협조로 이들이 머물기 시작한 난민캠프 중 하나였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잘라존은 점점 마을이 되었고 지금은 1만 3천명의 난민이 모여 살고 있었다.
잘라존으로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하고 좁고 낡아버린 길을 달려야 했다. 마치 도시에서 시골길을 가는 것처럼 풍경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러다 갑자기 길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으로 높은 담장에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등장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건물들이라도 있는 걸까 의아해 했지만 우리를 안내해 준 잘라존 출신의 아메르는 이곳이 이스라엘 점령촌이라고 알려줬다(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곳은 베트엘 점령촌이었다). 길의 왼편에는 금방이라도 부셔져 버릴 것 같이 낡고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자동차로 지나가고 있는 그 길은 빈민촌와 부촌을 나누는 경계와 같았다.  
모든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그렇지만 잘라존의 길은 매우 협소했고 차는 난민촌 입구에서 멈춰 서야 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서니 마치 옛날 서울의 달동네처럼 낡고 낡은 건물들이 조밀하게 서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동양인 방문자를 신기하게 보면서 따라다녔다. 잘라존은 60년 된 난민촌이기에 이 아이들은 벌써 난민 3세인 셈이었다.
난민촌이 고향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난민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과연 예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이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여전히 고향의 집 열쇠를 품에 지니고 있지만 이미 그 집은 사라지고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질 것이고 아이들은 노인들의 과거를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잘라존은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다시 이웃으로 삼으며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국제기구와 이웃 도시의 원조에 기대는 삶을 살더라도 학교를 만들고 아이들을 키워 오고 있었다. 조그마한 이곳 학교들 출신의 어린이들은 석박사가 되었고 팔레스타인의 지식인이 되었다. 그렇게 난민촌의 사람들은 높은 사회의식으로 인티파다와 민중 저항의 중심이 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난하고 비루한 난민의 삶을 벗어날 수 없어도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손님을 이웃처럼 맞이하는 친절함과 넓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누추한 처지에도 우리를 불러 세우며 좁은 집 안으로 방문을 허용하는 손짓에 안타까웠던 마음조차 누그러지게 했다.
이제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가 더 많아졌지만 지치지 않고 삶을 이어가는 모습 속에서 오히려 가진 자의 무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들어올 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기와 용기로 넘쳐나 보였다. 가진 자의 좁은 마음과 이기심을 질타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갈지언정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은 더 넘쳐나는 것 같았다.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이 땅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그 힘으로 끊임없이 생동하고 있었다.


▲ 잘라존의 아이들.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 아이들은 난민 3세가 되었다. 그러나 난민촌의 사람들은 활기와 용기로 넘쳐나 보였다. (사진=염창근)


헤브론, 파괴된 터전에 복원하고 다시 거주하며 공간을 지키다

헤브론에 갈 때는 꼬불꼬불한 지방 도로를 이용했다. 서안을 남북으로 곧게 뻗은 60번 도로를 이용하려면 여러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검문을 피하게 하려고 샛길로 멀리 돌며 헤브론으로 데려갔다.
남부 도시 헤브론으로 가는 길은 마치 사막의 언덕들을 지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황량하면서도 고고한 길이었다.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언덕길을 따라 곡예를 하듯 가면 군데군데 모래의 마을들이 나타나곤 했다. 이런 곳에서도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은 마치 고대 이야기 속에서나 그려졌던 이미지를 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헤브론의 올드시티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극심한 공격을 받는 곳 중 하나다. 유대 민족의 조상과 아랍 민족의 조상이 함께 묻혀 있는 모스크가 있다는 이유로, 극우 시오니스트들이 폭력적으로 팔레스타인 도시 안으로 진입해 유서 깊은 옛 건물들을 파괴했고, 팔레스타인 건물 위에다 이스라엘 건물을 지어 점령촌을 만들고, 길을 봉쇄하거나 통행을 금지하거나 세로로 나누어 이스라엘 길을 설정하면서 자기들 공간을 곳곳에 심어놓은 곳이다. 헤브론은 골목마다 이스라엘 군인 초소가 있었고 검문소가 있었고 CCTV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건물 위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 벽돌과 쓰레기를 던지고, 납치해 때리고, 물탱크에 구멍을 내는 폭력을 일삼았고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런 유대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검문하고 통제하고 제한하고 있었다.


▲ 팔레스타인 주택 위에다 지은 이스라엘 건물에서 던져진 돌과 쓰레기들. 이를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철망을 쳐 놓았다. 건물 아래 누런 부분은 팔레스타인 주택이었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건물이 있어 사용할 수 없다. (사진=염창근)

▲ 길 가운데에 있는 검문소. 헤브론 올드시티 내에만 110개의 검문소가 길과 건물 곳곳에 있다. 이 길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선 오른쪽으로만 다녀야 한다. 왼쪽은 이스라엘 길이다. 아예 아무도 다니지 못하도록 텅 빈 길도 많다. (사진=염창근)

가로 세로 1킬로미터, 서울로 치자면 지하철역 하나 정도의 거리의 헤브론 올드시티에는 4만 5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밀하게 살고 있지만 여기에 무려 5개의 이스라엘 점령촌이 있고 400명의 유대인이 들어와 있다. 헤브론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 400명은 끝까지 버티며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향해 오랫동안 잔인한 공격들을 해왔다. 그리고 이 400명의 유대인을 지키기 위해 1500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110개의 체크포인트를 두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초소에는 보안을 핑계로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벌주듯 이유 없이 세워놓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부수고 봉쇄해 버린 유서 깊은 헤브론 올드시티에 다시 거주하는 운동(Rehabilitation)을 1996년부터 시작했다. 유대인 점령촌에 의해 옛 공간이 빼앗기고 파괴되었지만 공간을 복원하고 올드시티의 삶을 재생시켜 온 것이다.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불러오고 새로 건물을 보수하고 학교를 세워 그 공간의 문화를 보존할 길을 찾아냈다. 학교에서는 옛 건물을 복원하는 다양한 기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곳곳에서 묵묵히 옛 터전을 복구하고 모습이 드러왔다.
‘헤브론 재거주위원회’의 한 활동가는 아름다운 도시와 이스라엘 군인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군사적 폭력에 맞서 공간을 지키는 재거주 운동이 끝내 이길 수밖에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 남은 유대인들은 매우 극렬한 시오니스트들이고 점령자들은 항상 종교를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지만 실은 필요할 때만 종교를 들먹일 뿐 자기들 이익만을 위한 행위이다.“ 우리가 오기 전날에도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인 살해 사건이 일어났던 만큼 극단적 공격이 일상화된 헤브론이지만 그런 공격의 근본 이유를 꿰뚫어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팽팽한 긴장마저 뛰어넘어 삶의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노력들에서 기억은 공간을 통해 재현되고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엿볼 수 있었다.


▲ 헤브론 재거주 운동을 위해 옛 건물 복원 기술을 익히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 (사진=염창근)

▲ 재거주한 건물의 창밖으로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동양인 여행자를 신기한듯 쳐다보았다. (사진=염창근)


팔레스타인 공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통한 어린이 문화교육을 왕성히 하고 있는 ‘타메르 공동체교육센터’는 몇 년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천 개의 이야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천일야화’의 구성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이 캠페인은 아이들에게 여권 모양의 작은 노트를 나누어주고 어떤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적어오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2009년에는 예루살렘에 관한 천 개의 이야기를 모으기로 했고, 아이들은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는 못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이웃 어른들에게 예루살렘 이야기를 여권 노트에 적었다. 목표는 천 개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모은 예루살렘 이야기는 6천 개가 넘었다고 했다.
타메르 센터는 아이들과 함께 예수가 걸었던 길을 따라 가며 팔레스타인 땅을 지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해 왔다. 종교를 현실의 폭력이 아닌 문화로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어우르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공간을 빼앗겼음에도 현재에서 이미 미래의 공동체를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했다.
점령촌의 역사가 그대로 표현하고 있듯 과거를 대한 이스라엘의 파괴는 물리적으로 강대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공간의 외관적 차이만큼 누구나 슬쩍 보기만 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공간들 속에는 점령자의 오만함과 피점령자의 슬픔으로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넘어설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식민지 시민이라는 굴욕 속에서도 살아가고, 잘라존의 주민들이 다시 마을을 만들고, 헤브론에서 옛 터전에 재거주를 하고, 타메르의 아이들이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내는 모습은 어쩌면 현실의 폭력이 얼마나 퇴행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파괴된 팔레스타인 땅에는 기억과 공간을 다시 연결시키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스라엘이 소멸시키려 해도 팔레스타인의 공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타메르 공동체교육센터에서 진행했던 ‘천 개의 이야기 모으기’ 프로그램 때 아이들에게 나눠줬던 여권 노트. (사진=염창근)



* 이 글은 레디앙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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