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성주] 천안함과 KAL858 : 고통에 대한 감수성

평화바닥 2010. 5. 25. 16:31

 

천안함과 KAL858 : 고통에 대한 감수성

성주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여성주의 국제관계학자 신시아 인로가 한 말이라고 한다. 지난 3월 26일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 ‘고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포함해, 천안함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1987년의 KAL858기(김현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이 사건으로 논문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더욱 그렇다.

“천안함 가족들 심정을 알 것 같다.” KAL858기 가족들이 입을 모아 이런 말을 했다. 논문 면접을 하고 있는 자리였다. 사건 자체에 대한 충격,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답답함,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고통과 먹먹함. 실종자 가족 3명을 같이 만난 자리였고, 그중에 한 분은 “내가 그만큼 겪었으니까”라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몸이 겪은 고통은, 다른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가닿는다. 고통은 고통을 알아본다.


‘자연스럽게’ 겨눠진 총

이 고통의 문제 외에도 천안함과 KAL858기는 비슷한 점이 많다. 초동수사의 문제점, 사건 직후 바로 제기된 북한 연계 가능성,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되는 보복과 응징,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일어났다는 점, 사건 수습과정에서의 미국의 적극적 개입, 가족들에 대한 감시, 정보 통제와 비밀주의, 실종/침몰시간 등을 포함한 수많은 의문점… 좀 과장되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두 사건은 정말 많이 닮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가족들과 고통에 대한 부분이다.  

천안함 가족들이 평택 함대사령부에 찾아갔을 때다. 무장군인들이 가족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가족들을 ‘위협’ 내지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침몰시간도 제대로 모르고, 정부는 정보를 계속 통제하고, 그래서 직접 알아보겠다는데, 이에 대한 응답은 무장군인과 총이었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권력은 총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이 총을 겨눈 부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군용트럭에서 내렸던 군인들은 그저 명령에 따랐고, 그들은 평소 훈련해온 대로 총을 겨눴을 뿐이다. 다시 말해, 가족들을 막기 위해 누군가 출동명령을 내렸고, 그에 따라 총은 특별한 의미없이 ‘자연스럽게’ 겨눠졌다. 어쩌면 이게 핵심일지 모른다. 명령권자/권력자가, 가족들의 고통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는 것이 권력이고 군대이다.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규율체계에 균열이 생긴다.

경찰이 천안함 가족으로 위장해 정보를 수집하려 했다는 건 어떤가.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뭐가 두려웠던 것일까. 총을 겨눈 일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을 ‘위협’ 내지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정부는 자신의 말만 믿으라고 한다. 가족들로서는 신뢰를 주지 않는 정부 말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스스로 대책을 세우고 정보를 교환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이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된다. 국가의 목소리, ‘주류지식’이 가족들에 의해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에 직면한 가족들은 ‘생존’의 수단으로 언어를 만들어내고 국가의 공식 대본과는 다른 무엇에 접근하려 한다. 거짓과 숨김이 없는, 자신에게 가장 믿음을 주는 방식으로. 국가와 권력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제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가족들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지시되고 이루어진다. 고통에 둔감하다는 얘기다.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이 일들은, KAL858기 가족들의 경험을 떠올린다. 국가의 공식 수사결과에서 수많은 문제점을 발견한 가족들. 재조사는 정당한 요구였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은 국가(안기부)의 협박과 감시. 김현희에 대한 공판이 진행되던 시점, KAL858기 가족들의 회의장소에 안기부 관계자가 찾아와 김현희 사면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몇몇 가족들이 항의을 하자 안기부 관계자는 가족들의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가족들의 고통은 그렇게 삭제된다. 또 실종자 가족들은 ‘이상한 사람들’이 동네 통장과 아파트 경비원에게 자신들의 동향을 물어갔다고 말한다. 가족들이 자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 그것이 죄인가. 그렇다. “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다.” (여기에서 ‘권력’이란 일단 좁은 의미에서의 권력을 뜻하는 것으로 하자. 한편 권력자가 고통 그 자체에 완전히 둔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 고통을 사유한다는 것,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긴장과 노동이 아닐까. 결국 그것은 자신을 ‘해부’하는 일이기도 하다. 권력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지 모른다)

천안함 가족들이 사건 조사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될 우려 때문이라고 말했다. 달리 표현하면, 정부가 가족들의 고통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가 주관해서 치러진 5일 간의 장례식. 이제 끝난 것인가. 천안함의 침몰. 북에 대한 응징의 북소리가 요란하다.



* 성주 님은 평화바닥 후원회원입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보낸 글을 조금 다듬은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77732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