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임유진] 슬픈 20대, 88만원 세대의 자화상

평화바닥 2010. 12. 24. 15:25

슬픈 20대, 88만원 세대의 자화상

임유진



20대는 억울하다?

엄마들은 자식 키우기 전에 어디서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는 걸까. “입을 옷이 없다”는 딸의 푸념에 돌아오는 똑같은 대답. “그동안 벗고 살았냐!!”
언젠가 한번은 나 스스로도 정말 그것이 궁금하여 곰곰 생각해 본 일이 있었다. 지난해 봄, 지난해 여름, 그리고 지지난해 봄과 여름에도 나는 분명히 새옷을 샀고, 가방을 새로 구입했으며, 신발도 샀다. 입고 나면, 메고 나면 없어지는 소모품도 아니거늘 나는 늘 물품부족에 시달렸다. 다른 여자들처럼 유행을 다 챙겨가면서 사이하이(Thigh High)부츠를 사고, 킬힐을 사고, 라이더 자켓을 사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나는 철이 바뀔 때마다 무언가를 사야 했다. 철이 지나도 자신의 ‘스타일’이니 ‘취향’이니 하는 말을 내세워 유행에 역행하기에 나의 감각은 지나치게 난감했고, 또 용기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파인아트(Fine Arts)를 비롯한 여러 예술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한 불우한 가정환경 탓도 있을 것이고, 데모할 때는 뒤로 돌아서 도망가더라도 맨 끝줄이 되지 않도록 꼭 중간에서 하라는 친척 언니의 가르침 탓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여러 가지 영향 탓으로 나는 빼어나지 않은 이상, 대충 묻어가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대충 그런 이유들로 나를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은 무엇에든 용기를 낼 수 없는 상황에 익숙해지고, 뭐든 중간이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고, 대학에 들어갈 때 전공 하나도 고집 부려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나약해졌다. 하물며 패션이야 오죽하랴. 꼭 옷이 너무 좋아서 갖고 싶어 산다기보다는 그냥 무난하게 입고 너무 올드패션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산다. 새옷을 입고 굉장히 예뻐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남들이 나를 패셔너블하게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물론 그동안 벗고 살았기 때문도 아니거니와-_-). 우리는 그저 철이 바뀌면 옷을 바꾸는 게 당연한 환경 속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이상하게 혹은 가엾게 바라보는 친구들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후줄근한 변명이라고 해도 어쩌겠는가. 이미 그런 장(場) 속에서 우리는 자라고 소비하고 살아온 것을.

조선시대 임꺽정과 두령들은 배운 거 없이, 가진 거 없이 자유로운 백수的 영혼으로 행복하게 살았다지만, 우리는 명백히 그들과 다른 시대에서 태어났고, 사리분별은 물론이거니와 똥오줌도 못 가릴 적부터 돌잔치에서 만 원짜리를 우리 손에 꼭 쥐기를 바라는 어른들 틈에서 살았다. 지금 20대의 부모들은 그들의 부모 덕 없이 자수성가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부모들 밑에서 우리가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돈은 우리에게 수단이 아니라 생존조건이었다. 탯줄을 자르고 돈줄을 이어붙이기라도 한듯, 돈이 있어야 예방접종을 하고 유치원에 가고 친구들과 사탕 하나씩이라도 빨면서 교우활동을 할 수 있었다(하하). 이런 우리에게 돈에서 자유로워지라는 것은 차라리 형벌이다. 그리고 불가능이다. 마트에서 갖고 싶은 장난감이 보이면 드러누워 진상을 떨면 그 물건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삶의 비밀을 깨친 이후(?) 이미 무엇이든 끊임없이 원하도록 세팅이 되었는데, 이제와 그런 욕망에서 홀연히 빠져나와 소박하게 살라는 것은 우리 88만원 세대에게 오히려 기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소비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이상 자본주의가 불편하지 않고, 너무 가난해서 사유의 힘을 박탈당했을 때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어렵사리 공부해서 대학까지 나와 고작 ‘계약직’으로 2년 일하다가 내팽개쳐지는 것은 우리도 바라지 않는다. 야자에 재수에, 엉덩이 힘으로 중등교육을 감내해 온 우리가 바랐던 삶은 그런 게 아니다. 88만원 세대가 벌 수 있는 돈은 백만 원 남짓인데, 쓰고 싶은 돈은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인 우리는 억울하다. 돈을 못 벌어서, 돈을 못 써서 억울한 게 아니다. 그냥 제발 쫌! 하라는 대로 하라기에 하라는 대로 했더니, 이제와 스스로 생각도 선택도 못하고, 삶도 독립적으로 꾸릴 수 없는 세대라고 손가락질하고 혀를 차는 것이 억울하다. 그렇게 가만히 욕을 들어먹기에는 억울할 만큼 우리는 충분히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아서, 슬프다.

돈 쓰는 낙밖에 없는 어떤 20대, D양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모은 D양. 애초에 결혼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비싼 외제차를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전세금 정도만 있으면 되겠다 생각하고 돈을 모았고, 마침내 전세금이 모였다. 더 이상 월세로 한달에 몇십만 원씩 지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돈 모으는 데 힘이 빠졌다.

주변 사람을 따라서 우연히 따라 들어간 명품 매장. 150만 원짜리 가방을 샀다. 가방이 명품이니 옷도 명품으로 사고 싶었고, 시계도 기왕이면 명품이었으면 했다. 명품 가방에 명품 지갑이면 더 좋겠지. 어차피 결혼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냥 지르지 뭐. 어려서부터 “돈 없다, 돈 없다” 하는 엄마의 돈타령만 들으며 컸던 터라 D양은 돈을 쓰고 싶을 때는 좀 쓰면서 살고 싶었다. 돈을 아껴 궁색한 것과 돈을 써야 할 곳에 제대로 쓰는 것을 구분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속옷과 양말에서부터 안경과 액세서리까지, 그냥 비싼 것을 마음껏 사는 구매 당시의 만족감이 좋았다. 어차피 다른 돈 쓸 일도 없으니.

사람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하는 것이 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일 텐데, 아무리 돈을 벌고 돈을 써도 잘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던 D양은 마침내 허무해졌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행복할까 하는 생각,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자기의 몸뚱이에 두를 비싸고 좋은 물건을 사는 것 외에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불우이웃돕기 명목으로 월급에서 일괄적으로 빠져나가는 후원금을 (수동적으로나마) 내고 있으니까, 자신도 할 만큼은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그외 나머지 돈은 다 본인에게 쓰리라. 왜냐하면 D양은 여행을 가도 즐겁지 않고, 일을 해도 별로 즐겁지 않고, 술을 마셔도 그냥 잠깐 그때 즐거울 뿐인, 그래서 낙이라고는 돈 쓰는 낙밖에 없는 20대이니까. “그 돈을 좀 다른 후원금으로 쓰지 그러냐”라는 권유에는 손을 내저으며 “야, 나도 돈 없어”라며 금방 우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가난한 20대이니까.

젊을 때 돈 많이 벌고 싶은 어떤 20대, Y

Y는 경영대 졸업반이다. 한국 아니고,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영어 원어민 선생님으로부터 어려서부터 밀착지도를 받았고, 영어를 한국에서만 배웠음에도 영어를 꽤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한다. 뭔가 회계 뭐시기라는 국제 자격증도 이미 획득, 한국 어느 회사에서는 벌써부터 Y에게 자기네 회사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Y는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고, 펀드 매니저 같은 게 되는 게 꿈이었다.

내가 만나본 Y는 번듯하고 성실하고 시원시원해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큰 어려움 같은 것을 만나보지 않았을 그는 늘 풍족하게 자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젊을 때 돈을 바짝 많이 벌고 싶다고 했다. 가난한 집 딸이었던 나는 돈 많은 집 애들은 돈 버는 일보다는 자신의 재능이나 관심에 따른 (돈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해 왔던 터라, 있는 집 자식이 왜 하고많은 직업 중에 돈을 많이 버는 일에 집착하는지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니 알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난이 자기 일이 아니었던 그에게는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젊을 때 돈을 많이 벌어서 훗날 자기의 자식에게 그 삶을 물려주는 게 인생 최고의 가치이고 행복이었던 거다.

번듯하고 정의로운 까닭에 위험에 처한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지만, 세상의 아픔, 세상의 수많은 빈자들의 아픔에 공명할 만큼 정의롭지는 못한 Y는 자신이 젊을 때 바짝 많이 벌어놓고 싶다는 그 돈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는 외국어에 능통하고 머리도 좋지만, 한 가장의 눈물이고, 한 학생의 학비이고, 한 가족의 생활비이기도 할 돈이 그의 젊음의 커리어를 빛내줄 연봉이 되리라는 것을 알 만큼 똑똑하지는 않다. 가난을 모르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 그의 미래의 직업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다. 그는 그 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그러나 어쨌거나 그가 만약 외국계 투자회사 입사에 성공을 한다면, 주변의 미취업자들, Y보다 잘나지 않은 아빠 친구 아들들, 엄마 친구 딸들은 그를 부러워할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자식 자랑할 때 으레 ‘연봉’이 큰 무기이고, 때로 그 무기에 많은 (잘나지 못하고 그냥 일반적인) 엄마 친구의 딸과 아들들은 맞아서 멍이 든다. 잘나가는 Y 같은 애들을 보고 백수이거나 88만원 세대 미만인 사람들이 그 직업에 대해 뭐라뭐라 해봤자 실패한 애들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될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돈이 제1척도인 자본주의에서 살고 있고, 그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금액으로 정의되는 이름까지 ‘세대명’(88만원 세대)으로 가진 사람들이니까.

88만원? 그거라도 벌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20대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부정적 뉘앙스와 온갖 사회적 함의들은 우리 스스로를 주눅들게 했다. 정확히 따지자면 우리 탓도 아닌 취업대란으로 졸지에 무능한 20대가 된 우리는, 다른 길이 안 보여서 직장이라도 좋은 데 구해볼까 하고, 직장 안 구하고 미래를 탐구하며(?) 놀고 있으면 부모님이 속이 타들어갈까봐 열심히 했을 뿐인데 다른 사회경험이나 공부는 안 하고 취업공부만 한다고 욕을 먹었다. 우리도 학문적 즐거움으로 전공 공부를 하고 늦게라도 발견된 우리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정말이지 그런 건 청춘만화에나 나오는 스토리이고 현실은 정말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나보다 토익 점수가 잘 나온 친구는 나의 경쟁자(“그럼 나는 컴퓨터 자격증이라도 하나 더 딸까...”), 나보다 잘생기고 예쁜 동기도 나의 경쟁자(“그래, 쌍꺼풀이라도 하나 해넣자...”)였다.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안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딱히 그것 외에 다른 기준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는 핀란드도 아니고 다른 유럽 나라들도 아니고, ‘스펙’으로 20년 우리 인생을 정의하는, 한국이 아닌가 이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 땅, 한국에서 나와 나의 친구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정말 속담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전정신이 어떻고 모험이 어떻고 하기에는 신문의 사회면에 나오는 실업률이 무서웠고, 서울역의 노숙자가 우리의 모습이 될까 무서웠다. 아 진짜…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와서 못쓰겠다.

*

몇 번인가 이곳저곳의 취업문을 두드렸다가 열리지 않아 실패하고 돌아섰던 기억. 주변에서는 “니 얼굴이 문제다, 성형수술을 해라”라는 실용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나도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세상에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그렇게도 많은가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최종면접까지 가서 떨어진 날은 스트레스로 잔뜩 무언가를 사댔다. 분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도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실패에 대한 분한 마음을 파마나 커트와 같은 헤어스타일의 변화로밖에 표현할 줄 몰랐다. 사회경험, 세상과 사물에 대한 인식,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돈, 능력…. 우리는 그 모든 게 부족하고 빈곤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돈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88만원 세대’라는 명명이 우리의 다른 빈곤함을 감출 수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좋아도 “대박-!” 나빠도 “대박-!”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빈곤한 세대다. 토익 점수는 그런 대로 나오더라도 외국인 앞에서는 우쥬라이크섬싱투드링크밖에는 할 줄 모르는 그야말로 빈곤한 세대다. 아프리카와 북한에서 기아와 가난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도 저들을 돕는 건 내가 성공해서 돈을 벌고 난 다음이라고 생각하고 자위하는 빈곤한 세대, 연봉이 높은 직장에 취직하더라도 꿈과 비전이 없는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세대다. 돈이 없어서 빈곤하다는 얘기는 구차해서 뺐다.

여기서 같은 20대라는 이유로 싸잡아서 무능하고 억울한 88만원 세대로 몰린, 근면성실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정진하는 드문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우리는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야 하는 20대이고, 꿈꾸는 법도, 돈쓰는 법도, 사는 법도 모두 배워야 할 것이다. 하필이면 이럴 때 태어난 게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태어났으니 살며 배우며,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보기에 한심할 테지만, 가진 건 체력과 열정밖에 없어서 배우면 잘 할 거다. 아마도.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임유진님은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의 블로그(http://greenbee.co.kr/blog/)에 포스팅된 것입니다. http://greenbee.co.kr/blog/1012?categor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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