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나는 지뢰ㆍ집속탄 금지운동에서 젠더 문제가 가장 중요해졌다

평화바닥 2011. 2. 26. 05:45

“나는 지뢰ㆍ집속탄 금지운동에서 젠더 문제가 가장 중요해졌다”
-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 청년대사 쏭 코살 씨

정리 : 문명진ㆍ염창근




▲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 청년대사 쏭 코살 씨 (사진=문명진)   

집속탄금지협약 1차 당사국 회의에서 지뢰 사고 생존자이자 캄보디아에서 대인지뢰 및 집속탄 반대 운동(Cambodian Campaign to Ban Landmines and Cluster Bombs)을 하고 있는 쏭 코살(Song Kosal) 씨를 만났다. 쏭 코살 씨는 이번 당사국 회의 기간 중에도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 청년대사(International Campaign to Ban Landmines Youth Ambassador)로서 정부 로비, 워크숍 발표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쏭 코살 씨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그녀는 현재 프놈펜 대학(영문학)에 재학 중이다.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은 생존자가 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캄보디아의 바탐방(Battambang) 주이다.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캄보디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매설된 곳이다. 1989년 내가 5살이었을 때 엄마와 함께 논으로 땔감용 볏짚을 가지러 나갔다가 지뢰를 밟았다. 사고가 나자 나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왼쪽 다리를 잃었다. 나의 큰 오빠는 군인이었는데 그도 지뢰 사고로 죽었다.
1994년에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센터를 개설하고 위험경감교육을 비롯한 피해자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난 그곳을 찾아가서 의족을 받으려고 했는데, 의족을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절단 부위의 상태가 많이 나빠 의족을 착용하더라도 걷기 힘들고 오히려 더 불편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의족 대신에 그때부터 목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하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인지뢰 반대운동을 하면서 대인지뢰의 위험성을 알리고 지뢰피해자 지원을 위한 서명 캠페인을 벌였다. 1995년 나는 제50차 유엔 정기총회가 열렸던 오스트리아 빈으로 초대를 받아 대인지뢰에 대해 발언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당시 너무 어렸고 또 수많은 청중 앞에서 너무 긴장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11살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캄보디아로 돌아온 이후 다른 지뢰 사고 생존자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1997년 대인지뢰금지협약이 체결되기까지 계속 캠페인에 참여했다. 1997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회의에서 122개 국가가 대인지뢰금지협약에 가입하는 성과가 있었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나는 이후에도 계속 운동을 해 나갈 수 있었다. 1997년부터는 대인지뢰 금지를 촉구하는 '피플즈 트리티'(The People's Treaty)에 서명을 독려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 세계를 대상으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유명해지다


1997년 이후로 스페인, 호주, 일본, 캐나다, 미국,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모잠비크, 모로코, 벨기에, 스위스, 프랑스 등 세계 각지를 돌며 대인지뢰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01년에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 청년 대사가 된 이후로는 젊은 활동가들과 생존자들을 대표해 세계 각지의 회의에 참석하면서 미 국무부 장관을 비롯한 다양한 정부의 인사들을 만나 대인지뢰금지협약에 가입할 것을 촉구했다.
일본에는 오래 전에 국제대인지뢰금지운동 일본지부(JCBL)의 초대를 받아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에 갔을 때 일본 학생들에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대인지뢰가 가지는 심각성을 이야기하였고 피해자 지원을 위한 기금 마련 캠페인에도 함께 참여했다. 일본에 갔을 때 인터뷰도 많이 한 덕분에 내가 일본에서 유명해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웃음)


지뢰와 집속탄은 정말 문제가 많은 무기다


이번 당사국 회의 개막 행사에서 상영한 영상 등 불발탄에 관한 많은 영상에서 볼 수 있듯 집속탄은 공중에서 투하된 뒤 다시 수많은 자폭탄이 분산된다. 미사일 하나에서 나오는 자폭탄은 축구장 3배에 달하는 면적에 흩어지고 이중 다수는 불발탄으로 남아 이후에도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는다. 특히 이 불발탄들은 다른 물체들과 구분해 알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장난감인 줄 알고 가지고 놀다가 사고가 나는 것이다.
이번에 캄보디아에서 함께 온 생존자는 2004년에 지뢰 사고로 두 팔과 두 눈을 모두 잃었다. 당시 그의 아이들이 어디선가 불발탄을 주워 와서 집 마당에서 태우려고 하는 것을 마침 할머니가 발견하고선 바로 아이들 아버지에게 얘기를 했고, 아버지는 아이들이 불을 피우기 직전에 그 불발탄을 빼앗아 근처 공터에 묻으려고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땅을 깊이 파는 와중에 옆에 있던 막대기가 그 불발탄에 쓰러지면서 부딪쳤고 불발탄은 폭발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살았지만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큰 희생을 치렀다.


▲ 집속탄 잔해로 만든 집속탄 폭발 모형 (사진=염창근)


'젠더와 집속탄 문제'에 관해 발표하다


이 역시 내 개인적 경험과 연결이 된다. 대학에 입학을 해서 학교로 걸어가고 있는데 지나가던 몇몇 꼬마 아이들이 나를 보고 장애인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동시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 특히 여성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통 여성 장애인들은 그녀들이 가진 장애 때문에 남성 장애인에 비해 훨씬 더 수줍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를 계기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1학년 때 교양수업에서 철학과 교수가 자신의 지인 중에 장애 여성과 결혼한 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왜 장애 여성과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많은 질문과 맞닥뜨렸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기 위해 난 정말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철학과 교수 정도면 정말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를 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다 나는 한 가지 대답에 도달했다. 그가 철학을 너무 열심히 공부해서 뭔가 정신이 이상해졌고 그래서 그런 말을 했나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웃음)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젠더 문제에 대한 문제 의식이 생겨났다. 그 이후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는 꼭 장애 여성들을 불러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의 경험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성 장애인은 장애뿐만 아니라 젠더에 의해 이중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나가 교육받을 권리,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의 일환으로 미스 랜드마인(www.miss-landmine.org) 행사를 준비했다. 지뢰 사고로 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한 행사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내가 활동하던 단체의 남성 활동가들도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보였다.
여성 장애인들은 남성 장애인들처럼 같은 지뢰 사고를 입어도 다른 경험을 하게 되고 또 자신의 장애에 대해 훨씬 더 수줍어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지뢰반대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 장애인들이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두었다. 이는 일반적인 차원에서 대인지뢰반대 운동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다.
한 예로 장애 여성들 역시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보통 여성 장애인들에게는 그런 욕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 주제는 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캄보디아 문화에서 여성은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없었다. 여성은 결혼을 한 뒤에는 남편과 자식을 돌보는 역할만 부여받지만, 우리 역시 남성과 동등하게 평등한 존재이며 따라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똑같은 지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성 생존자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받거나 집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남성 생존자들은 오히려 그들이 가진 장애 때문에 온 가족의 지원과 돌봄을 받게 된다. 지뢰 사고를 경험한 피해자들의 고통에 경중이 없겠지만, 젠더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은 한국 정부의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불발탄 피해자로서 한국 정부가 하루빨리 대인지뢰금지협약과 집속탄금지협약 모두에 가입하기를 바란다. 두 무기는 모두 너무나 위험한 무기들이다. 대인지뢰금지협약에는 156개국이나 가입했고, 집속탄금지협약도 정식 발효된 지 4개월이 지났으며 현재 이미 107개국이 가입을 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집속탄금지협약은 단지 한국 국민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협약이다. 한국 정부가 피해자 지원 등 집속탄금지협약이 다루는 내용들에 신경을 써주었으면 한다.
혼자만의 노력만으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언론 매체의 기자든 활동가든 한국인과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처음인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것도 모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이클 잭슨의 노래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를 좋아한다. 이 노래의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내게는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이 노래를 2003년 태국에서 열린 대인지뢰금지협약 제5차 당사국 회의에서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비롯한 지뢰 및 집속탄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공감해 하루 빨리 한국 정부도 협약에 가입을 하고 더 나아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며 어느 한 사람의 고통은 결국 나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속탄금지협약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강한 지지를 기대한다


+ 피플즈 트리티는 대인지뢰금지협약 채택을 위한 회의가 열리던 캐나다에서 시민들이 협약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히는 서명에서 시작되었다. 2008년 5월 지뢰자문위원회(MAG, Mine Advisory Committee)가 집속탄금지연합(CMC)과 함께 집속탄 사용, 비축, 이송, 생산을 금지하는 협약에 각국 정부들의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피플즈 트리티 운동을 다시금 새롭게 전개하였다.



* 평화바닥 회원인 날맹님은 '평화도서관'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1116143935&Section=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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