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물꽃] 피임, 임신 공포, 낙태, 산부인과...에 관한 이야기

평화바닥 2011. 1. 21. 13:07

피임, 임신 공포, 낙태, 산부인과...에 관한 이야기

물꽃



산부인과에 가다


얼마 전 약간의 하혈기가 있어 산부인과에 들렀다. 하혈의 원인은 자궁 경부에 생긴 플립(일종의 혹) 때문이었다. 간단한 초음파 검사로 바로 발견되어서 그 자리에서 제거했다. 산부인과에 다녀온 이야기를 주위 친구들에게 하니 많은 이들이 '비혼' 상태인 내가 산부인과에 아무렇지도 않게 갔다는 사실에 다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마치 내가 '용감한' 여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여전히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미혼/비혼 여성들에게 산부인과는 여간해서는 찾지 않는, 일반 병원이라기보다는 '임신한 부인들이 가는 특수 병원'인 듯 했다. 나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아서였는지 동네 병원을 곁에 두고 한 시간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는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까지 찾아가는 부지런함을 보였다. 사실 산부인과에 가면 반드시 비혼/기혼 여부를 물어보고, 비혼인 경우 꼭 성관계 유무를 물어보는데... 단순 사실 관계에 대한 질문인 것도 알고, 왜 물어보는지도 뻔히 아는데도... 여전히 그런 질문들에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산부인과를 다녀오면서, 그리고 그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과 나누면서 잊고 있었던 질문들이 다시 찾아왔다. 왜 젊은, 특히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여전히 산부인과는 이비인후과나 치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 수 있는 편한 병원이 아닐까? 여성의 생식기도 여성의 몸의 일부이니, 몸에 이상이 생기면 당연히 병원에 가듯 생식기에 문제가 있을 때 산부인과를 찾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텐데, 여전히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산부인과의 입구는 왜 여전히 턱없이 높게 느껴지는 걸까? 매년 3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그러한 불편한 시선들을 매번 직면하면서 그렇게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 산부인과 '후문' 간판... 왜 '후문' 간판이 따로 필요할까?


피임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는 것, 그것은 결코 한순간에 되지 않는다

여성이 가져야 할 '재생산의 권리'라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성관계, 임신, 낙태, 출산, 양육 등에 대해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을 가지는 주체로서 '가져야 하는 권리'다. 권리가 권리로서 존재하려면 선택과 책임을 가지는 주체는 관련 행위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들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또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절한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많은 비혼/미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설령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나의 재생산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트너 남성에게 콘돔을 끼우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산부인과에 다른 병원처럼 편안히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실 고등학교 때 받은 성교육이 고작인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은 첫 섹스를 할 때 피임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난 운이 좋게도 그 섹스가 임신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난 계속 준비 없는 섹스를 하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다음 생리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공포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처럼 피임에 미숙한, 혹은 피임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실제 그 지식을 실행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는 대다수 비혼/미혼 여성들에게 임신은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임신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안심할 수도 없고, 또 있었다고 해도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를 원치 않는 이성애자 여성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른다. 철저히 준비하면 되지 않느냐고? 마치 준비를 못한 내 책임인양, 나를 추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이 경험했겠지만...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피임에 적극적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당당한 성관계를 하겠다고 결심에 결심, 그리고 또 결심을 한 이후, 한때 나는 콘돔을 가방에 넣고 다녔으나, 실제 그 콘돔을 꺼내서 씌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순간엔 왜 이렇게 약해지는지ㅠㅠ. 그리고 질외 사정이나 월경주기법이 실제 피임에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방식에 자꾸 의존하게 된다. 피임에 당당해지고 적극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사회적 시선과 나를 둘러싼 기존 관습과 관념을 넘어서는 건 절.대.로. 한 순간에 되지 않는다.

나름의 경험 속에서 나와 그리고 상대방과의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들을 경험하면서 그래도 지금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나름의 자율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때로 실패하고, 그래서 늘 임신에 대한 공포는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가임기에 있고, 아이를 원치 않는 마음이 변치 않는 한 그 공포는 평생 짊어져야 할 짐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보던 주변의 한 친구는 내게 루프를 제안했다(루프는 여성 몸 안에 장착하는 피임기구이다). 일단 몸에 장착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싫어하는 나는 루프에는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내가 루프를 끼고 나면 상대 남성이 100% 콘돔 사용을 거부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리적 저항감도 생겼다. 뭐랄까...이성애 관계에서의 섹스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참여하는 것인데 왠지 루프를 하면 꼭 여자 혼자 피임을 준비하고 임신에 대비하는 것 같아 억울하게 느껴진달까?


100% 완벽한 피임법은 없다. 그러면 당신의 선택은?


어찌됐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루프를 사용해도, 또 설사 콘돔을 끼우는데 성공했다하더라도 현재 우리에게 100% 완벽한 피임방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저런 피임을 다 시도했더라도 원치 않은 임신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결국 원치 않는 임신을 최종적으로 종결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낙태,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길 뿐이다. 사후 피임약이란 것이 있지만 그 절차가 복잡하여 24시간 내에 먹는 것은 쉽지 않다(사후 피임약은 처방전이 있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럼 토요일엔 섹스를 하지 말라는 건가?). 그러면 남는 것은 임신중절, 즉 낙태뿐이다. 더욱이 현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피임뿐 아니라 임신의 과정 등에도 무지한 경우가 많아, 특히 청소녀들의 경우에는 산부인과의 문턱이 너무 높아서, 혹은 임신 등에 관한 정보에 무지해 임신 지속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때로는 후기 낙태를 감행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각 피임법의 성공률> 출처: 먹는 언니의 야후 블로그 : http://kr.blog.yahoo.com/fsplay/1686


<응급피임약 성공률> 출처: 먹는 언니의 야후 블로그 : http://kr.blog.yahoo.com/fsplay/1686

여성들이 낙태를 선택하게 되는 과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낙태는 하나의 독립된 행위라기보다는 피임, 성관계, 몸에 대한 지식 정도, 의료에 대한 접근권 등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삶의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낙태 행위 그 자체만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 행위를 한 여성을 처벌하는 현행법은 이러한 과정들을 생략하고 눈 감은 채, 도덕적, 형법적 잣대만을 여성의 몸에 들이대겠다는 것이다. 여성을 범죄화하여 낙태율을 줄여보겠다는 그 발상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결국 이런 범죄화로 인해 수많은 여성들은 기존 비용의 10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며 중국으로 일본으로 원정 낙태를 가거나, 그럴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들은 불법 시술소에서 건강을 담보로 시술 받게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낙태 불법화인가?


결코 끝나지 않는/않을 임신공포증, 그러면 우리는?


이번에 산부인과를 다녀오면서,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예상치 않은 질문들을 받으면서 30대에 접어든 비혼 여성인 나는 다시 나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무지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난 성관계와 피임에서 100% 온전한 주도권을 갖지 못하며, 섹스 후 늘 임신 공포증에 시달린다. 콘돔 등의 다양한 피임법을 사용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나 개인이 노력해도 사회적 시선과 남녀/여남 간의 불공평한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이 구도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이제 안다. 그래서 내게 낙태는 늘 최후의 보루이자 마지막 선택지점으로 남아있다.

나 역시 낙태를 줄이자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그 줄이는 방법이 낙태를 범죄화하고 낙태 시술한 여성을 처벌하는 방식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많은 미/비혼 여성들에게 산부인과는 그리 편하게 찾을 수 있는 병원이 아니다. 그리고 아직도 성관계에서 온전한 주도권을 가진 여성들이 많지 않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없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여전히 요원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대한 개선도 없이 무작정 마지막 피임 수단으로 낙태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낙태 범죄화를 외치기 전에 우리는 피임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관계의 평등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피임에 실패했을 때 임신중지를 택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아주 빠르게는 응급피임약이라고 부르는 사후피임약의 시판을 보편화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의사 처방전 없이는 살 수 없는 현재의 방식이 아니라, 약국에서 누구나 살 수 있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청소녀나 빈곤층 여성들이 시술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안전하지 않은 시술소에서 낙태 시술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낙태 의료보험 적용 확대도 고려해볼만 하다.

임신중지(낙태)역시 임신이나 출산과 마찬가지로 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재생산 과정의 하나일 뿐이다. 그 과정에 대한 선택은 분명 오롯이 그 여성에게 있다.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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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바닥 회원인 물꽃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에서 일하며, <버마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들>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에 쓴 글입니다. '낙태, 솔/까/말 프로젝트'는 낙태를 범죄화하려는 움직임들에 반대하며, 낙태는 여성의 삶과 건강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기 위한 릴레이 글쓰기 액숀입니다. http://glocalactivism.org/nga/now.html?action=view&wid=511&boardcode=korea_gp&mode=view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