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의 미래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 아나폴리스 중동평화회의라는 쇼
바람, 보리밭을 흔드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가 있다. 지난달에 모방송국에서 문제의식 가득 담긴 이 영화를 내보냈는데 덕분에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볼 때는 단순하게 북아일랜드 투쟁(혹은 아일랜드 독립투쟁)이 어떠했구나 하는 느낌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오늘날 모습이 그대로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일랜드 독립투쟁은 한국사람들에게도 다소 익숙한 역사다. 몇몇 대중적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경이 되기도 했으니까. 아일랜드는 수백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1919년 ‘IRA’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아일랜드공화군이 점령군 영국군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이면서 1922년에 빼앗긴 자유를 찾아왔다. 영국은 이들의 저항 때문에 독립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일랜드 전체의 독립국가 건설은 아니었다. 아일랜드 남부만 내주고 북부지역의 북아일랜드는 식민지배를 계속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이 아일랜드공화군과 영국 사이의 평화협정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아일랜드 국가는 남부만을 뜻하며 북아일랜드는 영국 일부(자치주)로 되어 있다. 그때의 평화협정 이후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북아일랜드 일부 세력들은 ‘IRA'이름을 쓰며 아일랜드 전체의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투쟁을 계속했지만, 극단적인 폭력적 방식으로 인해 입지는 점점 약해졌고, 이들도 결국은 몇 년 전 최종 평화협정을 맺고 무장해제하면서, 그 대가로 자치권을 받고 독립투쟁의 막을 내렸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 독립투쟁 과정에서 벌어지는 많은 갈등들을 보여준다. 아일랜드 의사였던 주인공이 친구가 영국군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그의 형이 이끄는 아일랜드공화군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다른 한 친구가 ‘밀고자’라는 것을 알고 혼란 속에서 그를 죽이는 모습,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고 있는 부자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 반쪽의 자유를 인정한 채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으려는 아일랜드공화군 지도부를 바라보는 논쟁들과 감정들... 영화는 자유를 얻기 위한 과정이 단순히 목숨을 건 전투와 수감의 어려움만을 의미하지 않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선택의 연속인지를 냉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 나에게 다가온 하나의 답답함은 반쪽 자치 허용이라는 평화협정을 둘러싼 아일랜드인들의 분열을 보면서 커져갔다. 주인공의 형은 현실주의 입장에서 이 정도에서 타협하는 것을 택하고, 주인공은 혼란 속에서도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원하는 것만큼 모두 이룰 수도 없을 것이며, 조금 덜 자유롭겠지만 목숨을 건 투쟁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이 분열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지는 선택으로 가게 했고 결국 아일랜드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투쟁과 그 속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 속 현실은 지금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 건설을 외치며 투쟁하는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결국 북아일랜드는 자치권을 인정받고 신교와 구교가 함께 공동자치정부를 구성하는 단계에까지 왔지만(물론 여전히 영국 속에서) 이를 위해 90년의 대립과정을 지나와야 했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한 장면
국가수립과 민족성은 여전히 대안일 수 있나
팔레스타인은 1948년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건국을 선포하면서 대재앙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60년 동안 점령반대 해방운동을 벌여왔다. 이 운동은 어느새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로 집약되었고 숙원이 되었다. 국가가 없어 침략받고 난민이 되고 땅을 빼앗기고 집이 이스라엘 불도저에 허물어지는 경험이 수십 년 간 무수히 반복되었기에,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는 길은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한국의 평화운동도 이를 안쓰러워하며 예의 반복적으로 되내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옹호하고 이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국가’라는 틀에 문제의식이 많은 사람들조차 팔레스타인 문제에 와서는 ‘독립국가’에 대해 크게 의심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은 과연 ‘국가 건설’이 답일까 하는 의문이 최근에 들기 시작했다. 물론 국가는 해당 자국민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줄 수 있을 정도로 이미 개개 국민들의 보호자가 된지 오래되었다. 현실의 세계는 국가로 이루어진 체제 속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국가 없이는 정말 살아가기 힘들어 보인다. 처참할 정도로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기 일쑤다. 국적없이 난민이 된다는 것은 저 유명한 유엔의 권리헌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며 힘겹게 개인이 홀로 현실을 버텨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너무도 처참한 삶을 의미한다. 지난 역사가, 식민지배를 받은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 사람들의 경험이, 지금도 인정받지 못하는 수천만 난민들의 생애가 이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런 현실 한가운데에 팔레스타인 민족이 있다. 이 단순한 현실이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한다. 그만큼 영토를 두고 민족자결권을 가지고 국가를 수립하는 것은 일종의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이다. 생존권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국가성과 민족성은 과연 대안일까?
국가수립과 민족성이 답이 되기엔 너무나 복잡한 과제가 뒤따른다. 국가가 수립되어 권리의 보호자가 되면, 개개인은 점차 민족국가에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동시에 타민족 혹은 타인에 대한 울타리도, 예의 모든 민족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견고해질 것이다. 개개인들은 국가와 민족으로의 동일시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평화를 향한 마음도 국가로 귀속되고, 국가의 이익 증대가 곧 나의 이익 증대로 동일시하는 때를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국가로의 인입과 동일시가 집단적으로 작동한다면, 우리가 국가성과 민족성에 갇히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울 것이며 국민으로서 ‘국가 이름’으로 스스로 나서게 될 것이 뻔하게 예상된다. 이는 생존일 수는 있지만 자유이기도 한 것이지 의문이 든다.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새 국가 속에서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혹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설 수 있다 해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평화를 빼앗기기는 마찬가지는 아닐까?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한, 그런 식의 세계 지배를 지속하는 한 말이다. 즉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바라는 진정으로 평화로운 세상은 국가건립이 된다해도 만들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평화를 참칭하는 세력들에 의해 운영되는 세계 속 시민에겐 독립국가라는 틀로는 해답을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 실현가능할까
그런데 과연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건설될 것인가?
몇 개월 전부터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간간히 “이제 팔레스타인도 독립국가를 건설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흘려왔다. 네오콘 인사들의 절대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이스 국무장관은 이를 누르며 마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현실화하려는 태세를 보였다. 국무장관이 자국 일은 내팽개치고 맨날 외국을 돌아다녔고 잦은 중동 순방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향한 길을 닦았다. 그 결과가 바로 아나폴리스 중동평화회의(회담)이다. 회의는 지난 60년의 지난한 분쟁과정을 무시라도 하듯 아주 신속하게 공존을 위한 2개의 국가건설을 ‘합의’했다.
부시 대통령도 주저하지 않았다. 사실 여기에는 부시 대통령의 의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2004년 재선에 성공했을 때, 그는 가장 역점을 두고픈 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 해결,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언뜻 이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고, 이란마저 침공하려고 준비하고 있고, 전 세계에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극단적 폭력을 휘둘러왔던 그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서 다룰 때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침공했을 때마다 철저히 이스라엘의 편에서 팔레스타인 거부주의 원칙을 분명히 했던 미국의 권력층(대부분의 결의안은 오직 이스라엘과 미국만이 반대표를 던져왔다)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니?
오슬로 평화협정을 이끌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퇴임 전에 세계사적 업적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자기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해왔고 진짜로 평화를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물론 내막은 전혀 다르며 오히려 정반대이다. 그간 그들의 행보를 봤을 때 여기에 무슨 속셈이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찌되었든 부시 미국 대통령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제기했고, 당사자 두 민족 정상이 합의했으며, 주요 강대국들과 중동의 15개 국가를 포함해 모두 40여개 나라 대표들과 국제기구 대표들이 참가해 동의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즉각 협상을 개시하고 2008년까지 2개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공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2주마다 이행을 확인하기로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나라를 민주국가로 만들어 평화와 안보 속에서 나란히 살도록 한다는 나의 비전을 이행할 것임을 약속한다”고 말하고, 이 회의에서 두 민족의 대표는 “몇십 년 동안 지속된 유혈사태와 수난을 종식하고, 자유와 안보, 정의, 존엄, 상호존중에 입각한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고 평화와 비폭력의 문화를 전파하는 한편, 테러와 선동에 맞선다는 결의를 표명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협상을 펼쳐 2008년 말 이전에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는 이렇게 온갖 좋은 말들의 성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합의를 미루어보면 두 가지 가능성이 예상된다.
미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중동평화회담
부시 미 대통령(가운데),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 (사진은 로이터=뉴시스)
하나는, 미국과 이스라엘과 그 협력자들이 정말 팔레스타인을 국가화하려고 하며 이에 따라 독립국가 혹은 독립적인 자치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점이다. 내심이야 영구히 식민지배를 하고 싶은 것일테지만, 중동 상황의 여러 가지 변화들로 인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매듭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마 미국은 충분히 팔레스타인 무장저항세력을 누그러뜨렸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오히려 더 극성맞은 이슬람주의-민족주의 부흥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에 평화협정이 추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재작년인 2006년에 하마스의 팔레스타인 집권과 올해 6월 하마스의 가자지구 장악을 목격했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중동지배에서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1979년 이란의 사례에서 통렬하게 느낀 하나의 과오였다.
미국은 자신의 현지경찰 노릇을 하던 이란 지배계급이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진 이후 지금까지 이란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있다. 갖은 채찍에도 이란은 점점 강대해지고 있고 최근에는 핵무기 생산 문제로 대결하고 있어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동의 가장 큰 불안요소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최악의 사례만은 막고 싶고 팔레스타인이 이란과 더 이상 긴밀해지는 것을 끊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분쇄되어야할 집단들이 살아남아 끈질기게 불복하며 지역 불안을 만드는 것에 나름의 당근용 카드를 꺼내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 잘 듣는 팔레스타인의 한 세력에게 국가를 내주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통해 통치하라고, 충분히 길들일 수 있고 또 팔레스타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오히려 걱정은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가 끈질지게 준동하는 소위 중동의 ‘테러세력’들과의 연계가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지역 불안정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무장저항운동이 다시 불씨가 지펴지는 것만은 막고, 팔레스타인 친미 그룹들에게 이 진압 과제를 맡기자는 의도로 해석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하마스 세력만 남았다. 지난 2년 간 하마스의 상승은 이런 미국의 권력층에 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하마스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서는 고립-봉쇄시키는 한편, 팔레스타인 친미세력들에게 직접 제압하기를 주문하는 길이다. 이것에 대한 거래가 바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제공이다.
게다가 이미 팔레스타인 문제는 주변 아랍국가들도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 미국에게는 호기로 작동했을 것이다. 주변 나라들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지난 해 아스라엘이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전쟁을 벌일 때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함께 폭격되었는데 그 후로 레바논 정규 군대가 직접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공격했을 때에도 아랍권의 움직임을 극도로 미미했다. 레바논과 요르단은 물론 가장 아랍 민족주의를 실천한다는 시리아마저 최근들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아랍권 국가들의 지배계급들은 자기들의 이해만을 중심으로 움직인 것은 오래 되었고, 국민 정서를 의식해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가 있을 때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들먹이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건설된다면 바로 이스라엘과 미국에 의존하는 시스템 속에 놓인 국가일 것이다. 이란을 뺀 모든 중동의 국가들과 강대국들, 그리고 국제기구까지 이번 중동평화회의에 모였다.이 속에서 나온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합의란 바로 미국 체제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쩌면 겨우 자치권을 인정하는 수준에서 정리될 수도 있으며 설혹 독립적인 민족국가가 설립된다해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며 실내용은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한 가능성은, 이번에도 역시 지난 평화 프로세스 과정처럼 숨겨진 ‘거래’ 속에 추진되는 하나의 쇼일 가능성이다. 이번 합의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무수한 문제들(가령 국경 문제, 난민귀환 문제, 예루살렘 지위 문제 등)을 사장시킨 하나마나한 이야기들 뿐이었고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유대민족은 유럽으로부터 이런 배제의 고통을 수없이 겪었음에도 배제하는 자의 입장에 서겠다는 세력들에게 계속 정권을 맡기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민주주의 유대국가가 말이 되는가? 유대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극단적인 인종주의이자 민족적 차별이 내재한 개념인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스라엘 평화단체 <피스 나우>가 최근 지적했듯, 평화협정이 준비되고 있던 최근까지도 오히려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은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스라엘은 언젠가 있을지 모를 팔레스타인 분리를 염두하고 최대한 영토를 장악해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협정에 나선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하마스 내각을 제외한 채 나섰고 미국은 이란을 제외했으며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적대지역으로 선포하며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참가국들과 국제 기구들이 논의했다는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에 대한 국제 지원, 팔레스타인 경제개발 및 정부기관 조직, 포괄적 중동평화 정착 등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번 평화협정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 함께 놓여 있다고 보여진다. 91년 마르디드 협정 때도 그렇고 93년 오슬로 프로세스도 그렇고 2003년의 로드맵도 그렇고 지금의 아나폴리스 중동평화회의도 그렇다. 이것은 평화라는 ‘수사학’으로 시간을 끌기 위한 수법처럼 보인다. 시간을 끌어 자신들에게 더 의존하도록 만들기 위해. 따라서 이런 합의들은 국제 문제에서 무력의 지배를 강력하게 옹호하는 협정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유대국가’를 나란히 제시하고 있다. 즉,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협정인 것이다.
왜 이 시점에서, 그간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 추진일까? 설마 부시 대통령이 노벨상을 노리고 있나? 실제 부시는 노벨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다고 전해지며, 또 오슬로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라빈은 노벨상을 받았다. 정말 노벨상이 목적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은 미국의 중동지배 정책의 일환에 포함되어 작동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일환 속에 추진되는 독립국가 건설은 정말 ‘독립’국가라 할 수 있을까?
‘민족자결권’ 주창은 강대국의 지배전략일지도
침략과 전쟁이 지배했던 제국주의-열강의 시대에 세계의 각 민족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꿈꾸었다. 1~2차 세계대전은 군사제국(독일, 이탈리아, 일본)들이 세계를 장악해갔고 이에 맞선 서구 강대국(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은 세계 각 민족의 독립 열망을 이용해 ‘민족자결권’을 주창했다(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그것은 서구 강대국들이 세계질서의 지배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전략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그들이 자기들의 세계를 만드는 방식이다.
어쨌든 서구 강대국들조차 ‘민족자결권’을 보장해주겠다고 하니 각 민족들은 이때 국가건설에 뛰어들었다. 각 민족들의 세력들은 서로 뜀박질했고, 목숨을 건 독립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한편 내부에서는 국가권력을 둘러싼 암투로 쌍방간 내전도 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 ‘민족자결권’을 보장하겠다고 한 것은 내전을 부추기면서 자기들 편을 찾고자 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들 질서를 만들기 위해 그들이 조성한 무대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소위 ‘강경파(혹은 급진파)’와 ‘온건파’를 나누고 온건 민족주의 세력을 길들이며, 즉 자기네 말을 잘 들을 집단에게만 지원을 해주었다. 한국의 사례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듯, 만일 온건 민족주의 세력들이 권력장악을 못 하거나 여러 변수들에 의해 어려움이 발생하면 직접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즉, 언제나 직접 개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대전은 서구 강대국의 승리로 결론지어졌다. 그들은 복종하는 민족에게만 국가 영토를 내주었고 그 대가로 의존과 이익을 요구했다.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지역의 각 나라 국경선들이 줄을 그은 듯 반듯한 것도 실제 서구 강대국들이 지도에 자를 대고 줄을 그어버렸기 때문이며, 그 자리에는 복종할 민족들의 나라이름을 적어 넣었기 때문이다.
복종하지 않았거나 자기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민족들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팔레스타인이 그랬고 쿠르드가 이에 속한다. 쿠르드는 터키의 현대사 전 역사에 걸쳐 참혹하게 억압받아 온 민족이다. 터키정부는 미국의 대규모 군사원조를 받아 쿠르드 학살을 진행했다. 터키는 독립투쟁을 벌이는 쿠르드인들에게 “터키는 하나이며, 따라서 쿠르드 독립국가는 절대 인정할 수 없으며, 쿠르드인은 터키의 국민이다”라고 말하며 독립을 불가했다. ‘자기 국민’이라면서 학살하다니.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동화 아니면 학살이라는 2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다. 쿠르드(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남아프리카공화국, 동티모르(인도네시아), 체첸(러시아), 아체(인도네시아), 웨스트파우아(인도네시아), 대만(중국), 티베트(중국), 코스보, 보스니아, 스리랑카 그리고 르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수많은 민족들 등등. 예의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새삼 거론할 것도 없다. 거슬러 올라가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등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그 때의 속국의 민족들이 다 그렇다. ‘민족자결권’을 이용해 세계 상황을 조장하고, 그들은 ‘주권국가를 세워볼테면 세워보라’고 각 민족의 세력들에게 주문하는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자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자기에게 복종해야만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 여기에 YES라고 답하는 세력들은 엄청난 지원을 받지만, NO라고 말하는 세력들은 가차없이 진압대상이 되어왔다. 이런 국제적 힘의 룰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포인트를 잘못 맞추어도 제거 대상이 된다.
늘 이런 방식이다. 마치 보편적인 인류애를 보여주는 듯한 언사를 내뱉으면서 권력을 향한 다툼을 조장하고, 자기들 밑에 줄을 서겠다는 세력들에게는 필요로 하는 만큼 지원하고 그래도 영 안 풀리면 직접 개입하는 그런 방식. 이것이 그동안의 전쟁의 역사였고 시스템이었다.
팔레스타인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국경을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 민족이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있다. 처음에는 영국이 이를 보장해주었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이 지배적 역할을 맡았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에게 세계 부를 제공해주었고 각종 영역에서 엄청난 이익과 세계의 지배권을 안겨주었다. 이런 미국에게 동부 지중해와 중동이 지니는 중요성은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석유산업과 수출입산업, 무기산업의 자유로운 활동은 이쪽 지역에 특별히 중요했다. 걸림돌은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급진적 아랍 민족주의’였고, 이들의 활동은 이익에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는 것이 일차적 우선과제였다. 그래서 나온 중동의 정책들은 일관되게 ‘아랍 민족주의를 제거’하는 것이며, 여기에 팔레스타인 민족도 포함되었고 따라서 분쇄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분쇄하기 위해(오늘날 표현은 ‘이슬람근본주의’이다) 미국은 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는데, 말 듣는 민족국가들을 보호국, 영향권, 완충국 등으로 규정하고 식민지들을 흡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통치보다 비용 면에서 훨씬 효과적이었다. 이런 아랍 현지 대리인을 통한 지배를 위해서는, 이들 대리인들이 반드시 자신들에게 의존적이어야 하고 그만큼 허약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여기에 해당된 것이 아랍의 독재 가문들이었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등 대개의 친미국가들이 여기에 속했다. 그런데 이런 지배전략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부 소요와 분쟁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과 그의 하위 파트너 서구 국가들은 이 대리인들에게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내 법 집행자들을 두었다. 닉슨 행정부는 이들을 ‘순회경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이란, 터키, 파키스탄 출신들 등 주로 비아랍인 민족들이 추천되었다. 지역 경찰을 맡은 그들은 중앙경찰본부, 즉 미국의 지배계급에 복종했고 불복하는 세력들을 진압해갔다. 한때 여기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도 이 지배전략에 밀려 하나씩 넘어갔다. 이집트가 그랬고 요르단이 그랬고 이라크가 그랬다(이라크의 후세인은 나중 미국의 룰을 잘못 읽는 바람에 제거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시리아가 넘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민족 분열전략과 이이제이(오랑캐로 오랑케를 제압한다) 전략으로 일관한 미국의 지배전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진행 중이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방식도 이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현재 추진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은 과연 평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동안 독립국가를 요구해왔다. 팔레스타인 전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이스라엘에 비타협적인 하마스마저 ‘1967년 이전 경계(가자와 서안)로 이스라엘이 물러간다면 이스라엘과 공존하겠다’고 말했다. 과연 누가 문제인가? 팔레스타인 마을에 관통도로를 뚫고 점령촌과 고립장벽을 세우고 검문소를 설치하는 이스라엘이 유대국가를 고집하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 합의되었다. 국가 건설을 믿을 것인가? 최소한 설득의 근거라도 가능할 것인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지배전략의 아래에서는 ‘독립국가’는 답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른 식의 답은 없는 것일까? 국가라는 틀이 아닌 다른 선의 인간관계, 다른 자유의 네트워크로 살아가는 것, 이를 위해 나선다는 것은 그냥 꿈인 것일까? 물론 쉽지 않게 다가온다. 민족의 입장에서 영토와 민족자결권과 국가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성이 있다. 그것이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면 반론의 여지도 생겨나기 어렵다. 하지만 국가가 필요없다고 말하며 국가없이 살아가면서도 인간적 권리를 누리는 길을 목표할 수는 정말 없는 것일까? 한때 시오니스트 일부 그룹이 ‘우리는 영원히 국가없이 디아스포라로 살아가자’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런 선택은 검토될 수 없을까? 인권과 평화의 보장은 과연 ‘국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일까? 질문은 꼬리를 물고 늘어지기는 하지만, 민주적 다민족 사회, 민족국가 체제에서 탈피한 다른 연결선들의 체제를 모색하는 것이 지금 평화를 만드는 일에 또한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2007. 11. 29. [수정 2007. 12. 4]
* 참조
-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 (노암 촘스키)
- 팔레스타인 땅 이스라엘 정착촌 (홍미정)
- 이스라엘과 미국의 중동정책 (홍성태 엮음)
- 악의 축의 발명 [시리아편] (모셰 마오즈)
- 당대비평 17호
- 아일랜드 독립전쟁 (홉킨슨)
- 위키백과 :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독립전쟁
- 네어버 : 북아일랜드
* 회원이신 염창근님은 '평화바닥', '이라크평화를 향한 연대' 등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문] http://peaceground.org/zeroboard/view.php?id=ground&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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