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이들이 자행하는, 불운한 이들에 대한 착취
― 그러나 모든 것에 웃는 남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저는 괴물입니다. 아니, 저는 백성입니다. 제가 예외적인 존재라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저는 모든 사람 중 하나입니다. 예외적 존재는 경들이십니다. 경들께서는 환상에 불과하되 저는 실체입니다. 저는 인간입니다. 무시무시한 웃는 남자입니다. 그가 누구를 보고 웃는지 아십니까? 경들을 보고 웃습니다. 자신을 보고 웃습니다. 모든 것을 보고 웃습니다. 그의 웃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들이 저지른 범죄이며 그가 당한 고초입니다. 제가 웃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울고 있습니다.”
그윈플레인, ‘웃는 남자’의 이름은 나이 열 살에 아무것도 없는 눈밭에서 살아남았다 하여 ‘하얀 평원’이 되었습니다. 1690년, 콤프라치코스라는 어린이 매매단에 납치되어 입을 귀까지 찢겨 평생 웃는 얼굴로 살아갈 운명이 된 ‘웃는 남자’는, 갑작스런 아동보호법 발효에 몸을 사린 매매단에게 버림을 받게 되고, 그 이후 철학자이면서 광대이고, 또한 인간혐오자인 ‘우르수스’(곰이라는 뜻입니다)와 그의 동반자 늑대인 ‘호모’(사람이라는 뜻이죠)와 함께 유랑하면서 살게 됩니다. 『웃는 남자』는 기구한 운명의 그윈플레인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사랑하는 이야기가 17세기 영국 사회상(귀족사회의 넘치는 부와 빈민층 생활고의 대비!)과 맞물려 복잡 오묘하게 흘러가는 역사·사회·로맨스·고발 소설입니다. 그윈플레인은, 삶 속에서 행과 불행을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며 그 가운데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대신하고 있고요(그에게는 찢어진 입이 기형이라는 점에서 불행이기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기도 했고, 나중에 밝혀진 그의 고귀한 신분 역시 그에게 행운이기도 했고 불행이기도 했습니다).
「웃는 남자」, 그윈플레인
_ 울고 싶어도 웃을 수밖에 없었던 '웃는 남자'. [「다크 나이트」의 '조커'의 원형이기도 하지만] 그윈플레인은 보다 따뜻하고 낮은 시선으로 민중의 '입'이 되길 바랐습니다.
1869년. 그러니까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는 100년도 훨씬 더 전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이 책을 읽으면서 2000년대의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낡지 않고, 늙지 않는 텍스트의 현재성! ‘고전’이 가진 힘이란 게 바로 그런 것이겠지요? 후후.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의 빅토르 위고(그 옛날,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때 읽었던 것 같습니다-_-;), 오래되고 유명한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던 위고의 작품을 2008년 끝날에, 그리고 2009년 새해 아침에 읽는 기분은 뭐랄까,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17세기의 영국 및 유럽 귀족사회의 고발과 역사적 통찰은 그야말로 시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었으니까요.
“경들께서는 코번트리 주에 있는 펜크리지의 주보 성당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그곳 주교를 더욱 부유하게 해주시기로 결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 주민들의 오두막집 속에는 침대조차 없습니다. 그리하여 땅바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아기들을 그 속에 눕힙니다. 결국 그곳 사람들은 요람이 아닌 무덤 속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 경들께서는 부자들의 부를 증대시켜 주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증대시켜 주고 계십니다.”
(『웃는 남자』하권, 예의 그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 ‘로드’(lord)가 되어 상원 회의에 참석하게 된 그윈플레인이 하는 연설)
떠돌이로 살면서 굶주리고 고통받는 빈민층의 삶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그윈플레인은 민중의 ‘입’이 되리라 다짐하고(“백성은 하나의 침묵이다. 나는 그 침묵의 거대한 변호사가 되리라. 벙어리들을 위해 내가 말하리라. 작은 이들에 대해 큰 이들에게, 약한 이들에 대해 강한 이들에게, 내가 말하리라.”) 상원 회의에서 발언을 하지만, 지금의 학벌 귀족, 부동산 귀족들이 그러하듯 그 당시의 귀족들에게도 역시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야유하고 비난하고, 그윈플레인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조롱했습니다. 벙어리를 대신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나, 듣는 이가 귀머거리라면 상황은 아주 비극적인 일이겠지요. 이와 같은 민중들의 ‘침묵’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영국, 글이 쓰여진 19세기 유럽사회를 뛰어넘어 20세기의 대표적 교육사상가인 파울루 프레이리(『페다고지』)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아,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21세기인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고요. 그러고 보면 정말 예나 지금이나 운수 좋은 이들이 자행하는, 불운한 이들에 대한 착취는 차이 없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지루할 정도로 말이죠.
“가난한 자의 아픔을 일찍부터 겪음으로써 그는 그 자신이 빼앗긴 자의 ‘침묵의 문화’라고 부른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는 점차 빈민의 무지와 무기력이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배 상황과 가부장제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빈민은 그 희생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페다고지』,「머리말」중에서)
프레이리의 빈민에 대한 자각과 마찬가지로, 그윈플레인도 낮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느 소녀의 이마에서는 매춘을 보았고, 부상당한 병사에게서는 전쟁이라는 유령을 보았고, 어느 노파의 이마에서는 굶주림을 보았습니다. 불우한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 무더기를 발견한 그윈플레인. 인간무지와 고통 때문에 인간이 토해 낼 수밖에 없는 짐승의 비명 같은 절규를 통역하리라 결심한 ‘웃는 남자’는 자신이 복수의 대행자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그저 익살광대일 뿐이었고, 자신이 귀족들에게 벼락을 치는 줄 알았는데, 기껏 그들을 간지럽게 했을 뿐이었고, 그는 감동을 거둘 줄 알았는데 그가 거둔 것은 오히려 조롱이었습니다. 그가 흐느꼈을 때 사람들은 모두가 즐거워했습니다. 그윈플레인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니까 말이죠. 귀족들의 정치논리로 어려서 납치되어 찢겨진 그 얼굴로.
정치적·사회적 무질서로 인해 인간의 삶이 극도로 비참해진 그 시절 19세기에, 그리하여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가엾은 사람들’밖에 보이지 않던 그 시절에 ‘웃는 남자’라는 제목을 떠올린 작가의 깊은 노여움과 냉소적 반발은 2009년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도―17세기 그윈플레인이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으로 눈을 돌려도 배곯는 아이들, 방치된 장애인들, 고립된 노인들,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 아직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전철 한번 타는 것도 두려운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나아졌다 믿고, 좋아졌다 믿고, 풍요로워졌다 믿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일까요? 2009년에는 부디, 모두가 골고루 웃음을 나눠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임유진님은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도서출판 그린비>의 블로그(http://www.greenbee.co.kr/blog/)에 포스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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