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현지] '평화교육' 연재를 시작하며

평화바닥 2009. 7. 11. 04:45

'평화교육' 연재를 시작하며

현지



오늘 내가 말하는 모든 낱말 하나하나는 평화를 말로 드러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한 인간사회가 누리는 평화는 그 사회 구성원이 향유하는 시(時)만큼이나 개성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의미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번역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 것입니다.  …문화는 늘 평화에 의미를 부여해 왔습니다. …중국어 ‘화평’은 하늘의, 위계질서 속에서 부드럽고 고요한 조화를 의믜하는 것인 반면에 인도의 ‘샨티’는 친밀하고 개인적이면서도 우주적이고 비위계적인 깨달음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간단히 말해서, 평화에는 동일화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결코 수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화는 옮겨 가면 반드시 타락합니다. 평화의 이전(移轉)은 전쟁을 의미합니다. 평화 연구가 이러한 자명한 인종학적 사실을 무시할 때, 그것은 평화 유지를 위한 테크놀로지로 전환됩니다. …너무도 많은 역사가들이 이 사실을 간과해 왔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전쟁이야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들 새로운 역사가들도 너무나 빈번히 가난한 사람의 평화보다도 폭력에 대해서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 이반 일리치, 2002



사교육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5년째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처음으로 ‘교육’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들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관심사는 ‘평화교육’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하지만 ‘평화’라는 말이 워낙 광범위하고 누가 쓰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되듯이 평화교육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구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역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그 지역의 공부방 이야기를 하며 평화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의 ‘평화교육’과 전쟁같은 일상에서 피상적 관계들 속에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평생교육의 개념 속에서 이야기하는 ‘평화교육’은 또 다른 것이다. ‘평화’가 다양하게 정의되어지는 것처럼 ‘평화교육’도 지향하는 바와 구체적 내용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까지 ‘평화교육=통일교육’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통일교육의 중요성을 넘어서서 ‘평화’의 범위나 주제에 대해 좀 더 확장시킬 필요성은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막연한 고민들 속에서 고병헌 선생의 <평화교육사상>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면서 문득 무언가 정리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한국사회의 맥락을 담아내는 ‘평화’는 무엇인지(이 주제는 똑똑한 다른 분들이 정리한 내용을 참고하기로 하고^^;;), 평화교육이 어떤 내용으로 얼마만큼 진행되고 있는지, 외국은 어떤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짧은 소견이나마 내가 생각하는 ‘평화교육’에 대해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과는 인연이 없었던, ‘교육’에 대해서는 너무도 무지한 내가 이런 내용을 준비해봐야겠다고 생각할 때엔 많은 용기와 무모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를 끌어줄 수 있는 조금의 ‘강제성’도 필요해서 기획연재의 지면을 찾아왔다. 어쩌면 많은 정보들의 요약판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얕은 밑천이라도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움과 정보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획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
연재하려고 하는 기본내용은 1)평화교육의 정의와 종류 2)외국의 평화교육 3)한국의 평화교육(가능하다면 현장에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 정도이다. 지금은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계획하고 있지만 시작되는 순간 더 많은 내용과 도전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떨리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간직하고 힘껏 해볼랍니다.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현지님은 <평화도서관 추진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전쟁없는 세상> 소식지 23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