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여옥] 몸보신이 필요할 때

평화바닥 2009. 7. 12. 05:52
몸보신이 필요할 때
<채식속으로 Go!Go! 4편>

여옥


남들이 보기에(특히 부모님이 보시기에) 세상물정 모르고 철도 안 들고 사는 것 같은 나이긴 하지만, 그래도 세월이 비켜가지는 않나 보다. 활동하고 있는 공간 이외에서 만난 사람들은 보통 나이를 가장 먼저 물어보는데, 대답에 대한 인사치레식의 반응들이 잠깐 이어진 이후에 받는 질문은 '남자친구 있어요?' 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약간 변형된 두 번째 질문이 나를 당황스럽게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고 있다.

"혹시 결혼했어요?"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기 시작하고 주말마다 예식장을 들락날락 하지만, 가끔은 결혼해서 이 바닥 뜰 거라는 시덥잖은 농담을 지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혼은 아직 ‘나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벌써 이런 얘기를 한다는건 좀 그렇다. 게다가 글로 쓰는건 더더욱 그렇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다 검색이 되고 기록으로 남는 이런 인터넷 시대에, 아직 20대인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쓰다니. 좀 민망하기까지 하다.

날이 갈수록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걸 느낀다. 특히 써지지도 않는 글을 짜내느라 밤을 꼬박 새거나, 기분이 좋아서 혹은 안 좋아서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일상으로의 원상복귀 속도가 많이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아무 이유 없이 아프기도 한다. (내 친구는 그 이유가 '나이들어서'라고 했다) 보통 긴장이 풀어졌거나 마음이 힘들 때 몸이 아프지만, 그 반대로 몸이 힘들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러다 보면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다니며 돈벌고 결혼하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부러울 때도 있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안달날 정도는 아니고, 몸도 마음도 큰 탈 없이 잘 버티고 있다.

그렇게 몸에서 무언가 채워 달라고 요구할 때, 그럴 때 생각나는 게 바로 보양식이다. 하지만 '몸보신'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몸에 좋다고만 하면 뭐든 구해다 먹고 심지어 외국에까지 나가서 희귀한 동식물들을 찾아다니다 결국 멸종 위기까지 몰고가는 그런 아저씨들의 이미지.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면서도 강한 남성성은 과시하고 싶어서 택하는 쉬운 방법 - 몸에 좋은 비싼 것들을 먹는 - 으로서의 ‘보양식’은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몸보신한다고 하는 게 그다지 좋은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는 몸보신은 그런 개념이라기보다는, 평일에는 활동하고 주말에는 알바하느라 쉬는 날 없이 사는 불쌍한 활동가가 체력적으로 부족함을 느낄 때 보충할만한 무언가가 생각나기도 한다는 그런 얘기이다. 여전히 조금 변명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가 하는거다. 최근에 몸이 아팠을 때 생각난 건 바로 삼계탕이었다. 세상에, 비육식을 하고있는 내가 먹고 싶은 게 장어도 아니고 홍삼도 아니고 삼계탕이라니. 이건 황사가 심한 날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자라 오고 생활해 온 문화 속에서 사회화되어온 나의 상상력은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새로운 경험이 필요한데, 맛있는 채식 식당은 떠올라도 몸보신을 할 만한 음식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도라지 찹쌀튀김 양념무침’, ‘모듬 버섯구이’, ‘두부 단호박 탕수육’, ‘검은깨 현미죽’, ‘부추된장비빔밥’ 등이 나왔다. 채소이면서도 보양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는 마, 더덕, 부추, 콩, 버섯, 호두를 비롯한 견과류 등을 꼽았다. ‘몸보신’의 느낌이 잘 오지 않는 요리들과 따져 보지 않아도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재료들이다. 그나마 얻은 정보라고는 칼슘 섭취에 우유나 사골보다는 다시마나 미역, 파래, 김 등의 해조류를 자주 먹는게 더 좋다는 것, 그리고 해조류에 들어있는 알긴산이라는 끈끈한 수용성 섬유질이 미세먼지나 중금속 등을 배출하는 역할을 해서 황사에 좋다고 하는 것 정도이다. 혹시 나는 채식 보양식을 모르는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걸까? 여전히 보양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 삼계탕으로 대표되는 - 때문일 수도 있고, 먹고 나서 기분은 좋아져도 힘이 나고 기운을 차리는 경험을 아직 해보지 못해봐서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내게 보양식은 '규칙적인 식사'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먹는 것만으로 하는 몸보신은 ‘일회용’일테니까. 채식한다며 빵, 떡볶이로 대충 때우지 말고 평소에 규칙적으로 밥을 챙겨 먹고 밤새지 말고 술은 적당히 마시고 틈틈이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 안 받게 휴식도 취하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다. 특히 활동가들에게는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건강한 것도 활동가의 능력이라면서 장기적으로 보고 지금부터라도 잘하라는 친구의 조언은 너무 고맙지만, 항상 나를 어렵게 만드는 얘기들이다.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여옥님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