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 : 하이파에 돌아와서
△ 나블루스 가는 길, 차창을 통해 본 서안의 언덕과 이스라엘 점령촌.
H에게
나블루스 가는 길
서안의 어디를 가나 느끼는 것이지만, 언덕의 땅 팔레스타인 서안은 정말 아름다워. 언덕들 위로 주욱 뻗은 60번 도로를 타고 라말라와 나블루스를 오고간 그 길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 한국의 강산도 아름답지만 크고 작은 언덕과 구릉이 서로를 얽으며 만들어낸 여기 풍경은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마치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것만 같아. 키 작은 쑥빛 올리브 나무들은 이 땅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장본인처럼 언덕마다 길마다 서 있어. 그 언덕들과 나무들 속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을과 도시가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해 있음을 금새 알아채게 해. 작고 오래된 건물들 속에서 그대로 삶을 이루는 그 모습은 참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서안 북부의 중심인 나블루스는 언덕 속에 자연의 일부처럼 놓여 있었고 그만큼 도시도 사람들도 정감이 넘쳤어. 라말라와는 많이 다른, 가난해 보이지만 가난하지 않는 그 무엇이 이 언덕의 도시를 감싸고 있었어.
그러나 이런 정감도 잠시, 어딜 가나 서안의 언덕 마루에는 이스라엘 점령촌이 떡하니 자리해 있지. 그것은 딱 보기에도 꼴불견의 모습. 가지런하고 세련되고 예쁘게 지어놓은 주택의 행렬은 그 자체로 점령지를 표시하고 있었어. 저녁이 되면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불빛들이 규칙적으로 언덕 둘레를 돌며 나타나는데, 점령촌의 환환 불빛 아래 여러 겹으로 쳐진 철조망에서 나오는 불빛이었어. 듬성듬성 희미한 불빛만이 불규칙적으로 있는 팔레스타인 마을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이 빛의 대조는, 만일 하늘 위에서 바라본다면 그대로 이스라엘 점령촌과 팔레스타인 마을을 선명하게 그려놓겠지.
그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언덕 위에 위치한 이스라엘의 점령촌을 바라보며 살지 않을 수 없어. 그것은 역으로 점령촌의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마을을 늘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 우리를 태워 나르던 승합차 운전수는 연신 ‘이스라엘리’라며 손가락으로 점령촌들을 가리킬 때마다 우리의 짜증도 그의 손의 움직임 횟수만큼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어. 그만큼 단절된 채 팔레스타인 서안에 퍼져 있는 점령촌들. 하나의 점령촌에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주요 도시로 연결하는 60번 도로에 곧장 직행하는 도로가 있어. 관통도로라 불리는 이 도로는 팔레스타인 마을을 뚫고 지나가기에 오히려 팔레스타인 마을을 고립시키고 있었어.
헤브론 가는 길
60번 도로는 이스라엘 도로이기에 아무 장애물 없이 서안의 언덕들 위를 남북으로 거의 직선으로 나 있지만, 헤브론에 갈 때는 꼬불꼬불한 지방 도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어. 나블루스와는 반대 방향, 즉 남쪽으로 가야했기에 곧게 뻗은 이 평탄한 도로를 이용하려면 예루살렘 옆을 지나야 하고 따라서 거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야.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검문을 피하게 하려고 동쪽으로 제리코 가는 길로 갔다가 샛길로 다시 빠져 멀리 빙빙 돌며 헤브론으로 데려갔어. 그래서 남부 도시 헤브론으로 가는 길은 마치 사막의 언덕들을 지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황량하면서도 고고한 길.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언덕길을 따라 곡예를 하듯 가면 군데군데 모래의 마을들이 나타나곤 했어. 이런 곳에서도 땅을 일구고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의 모습은 마치 고대 이야기 속에서나 그려졌던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분마저 들어.
그러나 헤브론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극심한 공격을 받는 곳 중 하나야. 유대 민족의 조상과 아랍 민족의 조상이 함께 묻혀 있는 모스크가 있다는 이유로, 극우 시오니스트들이 폭력적으로 팔레스타인 도시 안으로 진입해 점령하고, 팔레스타인 건물 위에다 이스라엘 건물을 지어 점령촌을 만들고, 길을 봉쇄하거나 세로로 나누어 이스라엘 길을 설정하고 자기들 공간을 곳곳에 심어놓았어. 그래서 헤브론 올드 시티의 골목마다 이스라엘 군인 초소가 있고 검문소가 있고 CCTV가 작동하고 있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건물 창밖으로 던지는 벽들과 쓰레기를 막기 위해 쳐 놓은 철망을 봤을 땐 정말 경악했지.
가로 세로 1킬로미터의 헤브론 올드 시티에는 4만 5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조밀하게 살지만 여기에 무려 5개의 정착촌이 있고 거기에 400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어. 이들 400명은 오랫동안 잔인한 공격들을 해왔어. 그리고 이 400명을 지키기 위해 1500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110개의 체크포인트를 두고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여기의 군인에게서는 그동안 봐왔던 어슬렁거림이 없었어. 초소 옆에는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을 벌주듯 한없이 세워놓는 모습도 코앞에서 볼 수 있었어. 아무리 종교적, 민족적 신념이 있다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은 걸까 의구심이 들 정도지만, 점령촌에서 살면 이스라엘 정부가 세금 면제는 물론 생활보조금까지 주기 때문에 이익과 밀착된 이유들이 더욱 광적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어.
△ 헤브론의 올드 시티와 이스라엘 점령촌.
△ 팔레스타인 건물 위에 지은 이스라엘 건물에서 던져진 쓰레기들과 돌들. 이를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철망을 쳐 놓았다.
△ 헤브론 올드 시티 내에만 110개의 검문소가 길 곳곳에 있다.
△ 이 길에서 팔레스타인 사람은 길의 오른쪽으로만 다녀야 한다. 왼쪽은 이스라엘 지역이다.
하이파에 돌아와서
하이파로 가는 길은, 나블루스로 가는 길과도 헤브론으로 가는 길과도 너무도 다른 여정이었어. 마지막 여정이기도 한 하이파 가는 그 길은, 내겐 마치 가싼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계속 상상하게 했어. 우리가 예전에 마음을 움켜쥐며 읽었던 이 소설의 이야기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어. 어쩌면 그것은, 영화 〈천국을 향하여 Paradise Now〉에 나오는 팔레스타인 청년이 나블루스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향할 때 그의 눈에 비친 풍경과도 겹치는 것이었어.
이제는 완전히 이스라엘의 대표적 해안 휴양 도시가 된 하이파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빠져 나와야 했는데, 이번에도 택시 기사는 최대한 검문을 피하기 위해 서안의 작은 길을 꼬불꼬불 지나 왔어. 아주 작은 산촌 마을들을 지나 어느 순간 이스라엘 도로 위에 올랐을 땐, 어김없이 공간의 급격한 변화를 겪어야 했지. 넓고 평평한 도로 위를 달리며 새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공간적으로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들이 본 그 풍경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착각을 했어. 이 아름다운 땅,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 땅은 그렇게 분명한 분할과 대조를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져.
해변을 따라 난 도로에서 본 지중해, 해변을 거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관광객들, 죽죽 뻗은 길을 아무런 제재 없이 달리는 차들…. 하이파의 풍경은 이제 팔레스타인이라고 하기엔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랍어를 쓰며 그 예전처럼 유대인들과 함께 살아가고, 팔레스타인 땅일 때의 옛날 건물들을 간직하고 있었고, 떠나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들이 텅 빈 채 남아 있었어. 그리고 아다니아가 〈하이파에 돌아와서〉의 배경이 된 그 광장과 그 언덕과 그 집을 안내해 줄 때는 마치 감전이라도 당한 듯 생생히 그 이야기가 떠올랐어.
땅의 기억, 장소의 기억, 공간의 기억…. 인간에게 장소만큼 의미 있는 것이 있을까. 그 땅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에게 그 공간이 파괴되어 사라졌다는 것만큼 충격적인 것이 있을까. 혹은 그 공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면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의미로 가득 찬 공간을 잃어버리는 일만큼 슬픈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어.
△ 이스라엘의 대표적 휴양 도시가 된 하이파. 가싼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의 배경이 된 언덕과 집.
팔레스타인에서 만나고 사귄 친구들이 내게 ‘평화’가 무엇이냐고 묻곤 했어. 그리곤 ‘희망이 보이냐 절망이 보이냐’고 묻기도 했어.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어. 물론 한 번 스쳐가는 이방인에게서 답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물어본 것은 아니겠지. 표현하진 않아도 그들의 답답함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보면서 알 수 있었던 게 하나 있어. 그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로 떠돌아다닌 유대인들을 받아준 것은 팔레스타인이 유일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 소중함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잊지 않기를 기원해 봐. 그리고 이 땅 깊숙이 들어와 있는 수많은 한국 기업의 자동차와 전자 제품들, 성지를 순례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한국이 이익으로만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더 나은 인간적 관계를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봐.
2009. 12. 17
하이파에서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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