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들 : 예루살렘, 베들레헴, 잘라존의 벽
△ 베들레헴에 있는 분리장벽
H에게
벽이란 무엇일까? 물질적으로는 일정 공간을 구획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와 너를 나누고 그 영역을 결정하는 분리와 배제의 의식이 자리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 벽은 한편으론 너(외부)로부터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소통을 단절해 그 안에 갇히게 하고 결국 고립을 낳기도 하는 것 같아. 이곳 팔레스타인은 벽이 가진 이 무서운 의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곳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너도 잘 알겠지만 팔레스타인은 수많은 벽들이 장엄하리만치 많은 곳. 이렇게 아름다운 땅에 어디를 가나 벽들의 연속이야. 팔레스타인 서안을 돌아다니는 내내 벽들을 마주해야 했고, 벽들을 돌아 돌아 가야하는 일은 불과 얼마 머물지 않은 시간 동안에 어느새 당연한 의식이 되어 버렸어. 벽을 통과하려면 체크포인트(검문소)를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데 어슬렁거리며 오만하게 검문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의 체크포인트를 몇 번 겪고 나니 완전히 진절머리가 났어. 그런데 이조차 최근엔 많이 간소해진 검문 절차라고 해. 그렇다면 도대체 예전에 어떠했다는 것일까, 몇 번 겪은 것만으로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되는데 그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간 것일까, 이 땅에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상상력을 펼칠수록 갑갑해지기만 해. 그나마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덕분에 도로에서의 검문은 대체로 쉽게 통과했지만 이도 군인들 마음에 달렸다고 하니 검문이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는 알 수 없어.
도로 위 검문은 대개 눈짓이나 손짓으로 눈 까딱, 손 까딱 한 번으로 통과하는 경우도 있지만 총을 든 군인이 문을 열고 하나하나 체크하기도 해. 높임말이 따로 없는 영어지만 완전 반말을 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의 태도란…. 젊은 군인의 나이만한 자식이 있는 50대에게도 그들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래서 50대 선생들은 조금 당황하기도 했어. 한 번은 일행 중 한 명이 여권을 챙기지 못한 채 검문에 걸렸는데 완전 얼어버렸지. 그래도 우리가 ‘코리아’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냥 보내줬는데 마치 ‘친이스라엘 한국’을 현지에서 확인하는 것만 같았어.
△ 예루살렘의 올드 시티로 들어가는 8개 문 중 다마스커스 게이트
△ 2천 년 전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세웠으나 로마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는 성의 남은 흔적, 통곡의 벽
체크포인트 이야기는 하고픈 이야기가 많아 따로 하려 했는데 이야기하다보니 길어졌다. 쇠파이프로 된 4개의 회전문으로 된 유명한 칼란디아 검문소를 지나 ‘성지’라 불리는 예루살렘을 갔을 땐 그야말로 벽 앞에 서 있는 경험을 색다르게 하게 되었어. 동예루살렘과 올드 시티 내 아랍 지구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을 잠시 엿보고 싶었지만 정작 예루살렘에서 마주한 것은 거대한 벽들의 장관이더라. 올드 시티 자체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내부도 굳건한 벽들로 이루어진 좁은 길들이 조밀하게 나 있었지. 예루살렘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거대한 상점이었기에 그 벽은 더욱 견고하게 보였어. 4개의 지역(아랍인 지역, 크리스천 지역, 유대인 지역, 아르메니안 지역)으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공존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소통되지 못하는 단절의 분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여 더 씁쓸해지기만 했어.
이처럼 분할의 벽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 때문이지만 어떻게 이토록 공간의 추상성이 단번에 구체성을 가질 수 있는지 좀 의아해져. 그중에 가장 잔인한 벽은 유대 지구에 있는 ‘통곡의 벽’이었는데, 수많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그 벽에 빼곡히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는 모습은 자기만을 위한 집단적 의식처럼 보였어.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옛 영광이 로마에 의해 무너지고 유랑의 삶을 시작해야 했던 그들이 그 옛 영광의 흔적 앞에서 자기 민족의 염원만을 벽 틈새로 밀어넣고 있었지. 광장에서 이스라엘 아이들이 국가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군인들이 곳곳에서 그 벽을 바라보며 조국을 생각하는 모습은, 익히 수없이 들어와 잘 알고 있었음에도, 몸도 마음도 불안하게 했고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어. 그리고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했어. 광장 가운데서 바람에 펄럭이는 국기는 단지 그들만의 상징은 아닐 테니까.
조국과 종교, 그리고 이익. 그것이 과연 인간에게 무엇일까 하는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걷다 유대 지구에서 잠시 길을 잃었는데, 길을 찾다 또 확인한 것이 있었어. 다른 지구와는 확연히 다르게 유대 지구는 반듯하고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야. 지저분하고 요란스러워 보일 뿐만 아니라 낡고 거대한 철문 안으로 주택을 감추고 있는 아랍 지구와는 확연히 대별되었어. 이 차이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새삼 환기시켜줘.
그러나 베들레헴에서는 전혀 다른 공간의 분할, 감히 넘어볼 수 없는 거대한 분리장벽 앞에 서게 되었지. 8미터 높이라고 하지만 훨씬 더한 체감의 높이는 턱 막힌 고립의 압력을 전달해 줘. 사진으로 볼 때도 참 먹먹하게 하던 이 장벽은 실제로 그 앞에 서니 할 말을 잃게 만들어.
1957년에 이스라엘 점령촌 건설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잘라존 난민촌에 갔을 때는 그곳 출신 아메르가 우리를 안내하면서 길 건너 있는 웅장한 벽을 가리켰어. 길가에 있는 엄청난 높이의 벽과 그 위에 쳐진 철조망. 아메르는 그 너머에 바로 이스라엘 점령촌이 있음을 알려줬어. 저곳에 살다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바로 그 옆에 난민촌을 만들고 그렇게 벽을 보며 살아가고 있었지.
인간에게 공간은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 공간이 이렇게 참혹하고도 극명히 대별하며 구체성을 띌 때 벽은 배제이자 고립이고 무거운 압박의 의도를 정면으로 드러내게 돼. 그래서 벽이 주는 이러한 폭력성은 어마어마한 무서움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봐. 그러나 분리장벽의 실체를 허물고 있는 벽화에서, 시인 다르위시가 그 벽을 뚫고 나오는 그래피티에서, 초라한 자기 집에 기꺼이 낯선 타인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잘라존 난민촌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에서 분리와 배제를 뛰어넘는 다른 무엇도 볼 수도 있었어. 벽을 마주하며 머리 숙여 한참을 말없이 사색하던 김해자 선생님이 팔레스타인 친구들에게 전한 작은 연대의 마음을 네게도 들려줄게.
△ 베들레헴의 분리장벽에 그려진 팔레스타인 시인 다르위시
물로 돌아가라
라말라 거리에서 나는 물처럼 흘러다녔다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을 불러세워 동그란 과자를 집어주는 할아버지의 눈빛에서도
길을 가르쳐주는 청년의 걸음 속에서도
따스한 물기가 배어나와 시장통을 물들이고
내 가슴에도 흘러들어왔다
아무런 상관없는, 낯선 자를 향해 오랫동안 눈빛을 맞추며
경쾌하게 흘러나오는 살람, 속에서
나는 오래 전에 잊어버린 형제여, 라는 소리를 들었다
거래할 마음이 없는 오, 형제여...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환대한다...
방금 전 침묵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물소리가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와
내 안에 갇힌 딱딱한 무언가를 녹이고 있었다
고체덩어리가 만든 완강한 고체덩어리들,
가로막힌 분리의 장벽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나는 지금 벽 바깥에 서 있는가,
벽 안에 갇혀 있는가,
벽을 쌓은 자의 나라에도 구원이 있는가
벽을 쌓은 자가 스스로 벽을 허물 수 있는가,
바람이 가고 바람이 오고
모든 것이 섞이어 새로운 바람이 태어나는 모퉁이,
시인이 벽 속에서 걸어나왔다
벽속에 붙박혀 있던 다르위시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벽을 만든 자여
그대들은 우리를 가두었다 생각하는가,
우리는 결코 완전히 갇힌 적이 없다,
너희들이 만든 벽조차
흘러 섞이는 우리의 젖은 가슴을 고체덩어리로 만들지 못한다,
애초에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잊은 적이 없기에
형제를 잊어버린 적이 결코 없기에
갇힌 자의 비통한 눈물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해방은 억압받는 자들의 아픈 심장으로부터 온다
물로 돌아가라, 애초부터 금을 모르는
어디에도 벽이 없는, 물로 돌아가라
저 벽을 관통하라
순간 태양이 벽을 비추고
잿빛 벽이 하얗게 뚫렸다
2009. 12. 14
라말라에서
* 평화바닥 회원인 염창근님은 '버마어린이교육을생각하는사람들','평화도서관을 만드는 사람들' 등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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