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비군의 ‘양심’
- 예비군 대체복무제 도입에 관한 이야기 -
성주
“양심이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되겠습니까?”
그 한 마디에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고 경찰서로 소환된 날이었다. 이미 군대에 갔다온 뒤에 훈련을 거부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경찰의 지적. 양심이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어떻게 그게 양심이냐며 준엄히 나를 꾸짖고 있었다. 그때의 복잡한 감정을 좀처럼 잊지 못한다. 훈련 거부 자체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전과 1범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위축감. 게다가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던 ‘양심’에 대한 회의감. 난 그렇게 흔들렸고, 한동안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양심의 문제와 직접체험의 힘
“이미 군복무 경험자로서 그 진정성을 신뢰하기 곤란.”
2007년 9월, 나는 그 복잡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국방부가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실상의 대체복무제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예비군은 그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이미 군대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말은, 내가 경찰서에서 받았던 질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글을 통해 그때의 복잡했던 감정을 되새겨보려 한다.
(한편 현역 근무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은 병역거부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에 여전히 처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 등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비군 대체복무제는 예비군 제도 ‘폐지’의 과도기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비군 폐지와 관련해서는 더 많은 논의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양심을 ‘고정불변’의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문제는 넓게 보면 삶과 사람 자체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과 상처를 겪게 되는데,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성장’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예비군 훈련도 예외가 아니다. 군복무를 통해 겪은 경험과 상처는 나 자신에게 적지 않은 고민을 안겨다주었다. 그것은 군대에 가기 전의 나와, 군대를 경험한 나와, 군대를 제대한 나 사이의 어떤 깊이 있는 ‘대화’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대화의 과정을 통해 나는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낙하산을 타고 투하된 전혀 새로운 내가 아닌, 과거의 내가 확장된 또 다른 나였다. 사람은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삶은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결국 신념과 가치관의 진정성이라는 것도 획일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직접체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비군은 군대를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군대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더욱 생생히 증언할 수 있다. 직접 총을 쏴봤고, 직접 폭력을 당해봤고, 직접 가혹행위를 해봤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직접체험에서 우러나온 생명력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예비군은 일종의 ‘내부 고발자’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군대를 경험한 모든 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험 자체가 단일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각자의 경험 역시 개인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같은 예비군이지만 어떤 이는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훈련을 그대로 받는다. 또 훈련 거부와 관련해서도, 생각은 있지만 벌금과 징역형의 부담감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 이러한 부담감과 훈련 자체에 대한 고민의 부족으로 두 차례에 걸쳐 ‘상징적인’ 의미의 거부를 했다.
중요한 것은, 군복무자로서의 경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더욱 진정성 있는 증언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이 말은 군대를 경험하지 않은/못한 이들의 발언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울러 직접체험의 중요성은 전쟁에 참전한 (남성) 작가들이 전쟁과 폭력에 대한 성찰적 작품을 남겼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비군 훈련과 자기언어 찾기
그때의 나를 불러본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며 혼란스러워하던 나를.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것에서 벗어난 상태는, 불안과 괴리와 분열을 가져온다. ‘정상’의 이름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가 내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오는 내면의 목소리는 종종 나약함과 혼돈으로 떨리게 된다. 기존언어에서 자기언어를 찾아내는 모든 과정은, 자기분열과 혼란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장, 한다.
예비군 거부 역시 마찬가지다. 군복무자로서 그 진정성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은, 인간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이 부족한 데서 나온 게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어쩌면 다른 상상력의 ‘침투’를 ‘방어’하는 행정편의주의와 군사주의가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침 인권위가 최근 예비군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는데 관련기관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국가는 자신이 정한 표준에 맞게 규격화된 제복과 총기를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생각과 가치관마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폭력이고 전쟁이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실린 것입니다. (2007년 12월 13일)
* 성주 님은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원문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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