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의 시선

[혜란] The Moon - 존재에 대한 의문

평화바닥 2010. 2. 11. 01:57
 

The Moon - 존재에 대한 의문


                                                                                                        



한 사람이 태어났다. 밥을 먹고, 싸고, 잠 자며 자랐다. 행복하고, 애틋하고, 아련한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그 기억에 대한 행복하고, 애틋하고, 아련하고, 쓸쓸한 감정들을 또한 기억하며 살아왔다.
현재 그는 여전히 밥을 먹고, 싸고, 잠 자고 일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다. 소소하든 거대하든, 또는 고민스럽든 자신의 사람, 공간, 기억,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기반한 미래를 늘 고민한다. 과거와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상이니까 '내 삶'에 대한 고민은 있되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은 없다.
아주 단순하게, 사람은 이렇게 살아간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 어느 한 고리가 어그러지면 혼란에 빠진다. 각종 드라마에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은 현재에서 허우적대며 미래를 만들지 못하지 않던가. 아니면 이래저래 살아간대도,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되내이며 음울하게 살아가든가.





지구 자원이 완전히 고갈된 어느 미래, 샘 벨은 달 기지 '사랑SARANG'[각주:1]에서 자원을 채취하기 위해 3년 째 근무하고 있다. 그는 2주 뒤면 지구로 귀환할 예정이다. 사랑하는 아내 테스가 있고, 이제 막 말을 배워 어설프게 '아빠는 우주 비행사'라고 옹알대는 어린 딸이 있다.
아무도 없는 기지에서 로봇 거티와 함께 일을 하고, 대화를 하며, 취미로 무언가를 만들며 황량하게 살아가지만 아내의 영상 편지를 보고,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지구로 돌아갈 때를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눈을 뜨니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는 샘 벨이다. 그도 샘 벨이다.



'도플갱어'라는 소재가 한 때 유행이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도플갱어)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게 된다는, 서양의 전설 즈음 되는 소재를 갖고 영화도 여럿 나왔다.
당연히, 샘 벨은 도플갱어를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는 같다. 샘 벨이 또 다른 샘 벨을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그 둘은 애초에 만나서는 안 되는 사이였고, 그 둘이 만나게 된 것은 프로그램의 '오류'였다.
한 직원이 달에서 3년을 근무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은, 클론이 3년을 근무하고 폐기되면 다른 클론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시스템이었다. 샘이 애타게 기다렸던 귀환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자신'들'이 클론이었음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두 샘의 반응이다. 프로그램 설정상, 샘1은 3년을 근무하고 귀환하기 2주일 전, 샘2는 달에 도착해서 막 순환 근무를 시작한지 1주일이 되었다. 샘1은 통신 장비 고장(사측의 사기 행각)으로 지구와의 직접적인 대화조차 없었던 3년 간의 외로움을 힘들게 견뎌왔고, 가족과의 만남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샘2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사무친 그 3년을 아직 살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을 안 샘1의 슬픔과 혼돈은 상대적으로 샘2보다 극심하다.
자신이 클론이었다는 것을 안 직후, 황량한 달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집에 가고 싶어."라고 울먹이는 샘1. 존재하지 않는(정확하게는 자신의 존재를 모르는) 자신의 집과 가족에 대해, 자신이 살아온 시간만큼의 만들어진 기억을 가지고, 그 시간만큼 쌓아온 감정으로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샘의 슬픔은 보고 있기도 힘들다.  

<트루먼쇼>
[각주:2] 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지만,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는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받았던 충격, 그 느낌은 구체적이다.
트루먼의 삶, 기억 또한 만들어졌고,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미래 또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존재했나?'라고 묻는다면, 좀 머뭇대다가도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들어졌지만 삶이 있었고, 기억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희노애락이 있는 샘 벨은 인간으로서 존재한 것인가? 대답하기 좀 어렵다. 단순히,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대답을 못한다면, 샘에게는 참 잔인한 일이다.  





인간 샘(영화 속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이 인물은 클론의 '원본'이라고 해야 할까.)과 클론 샘의 관계를 보며, 지구와 달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 속에서 달은 지구를 위해 일한다. 또는 혹사당한다. 아마도 지금 이 상태로 내내 지구를 혹사한다면, 멀지 않아 영화 속에서 설정한 지구처럼, 지구의 자원은 남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배려는 눈곱만큼도 찾기 어려운 인간들이 달로 시선을 돌릴 것은 빤하다. 그리고 달이 혹사당할 것이다. 파헤쳐지고, 파헤쳐지고, 파헤쳐지면서
달이 허락하든 안 하든 중요하지 않다. 지구의 위성으로 지구의 주변을 돈다 해도, 엄연히 우주의 하나로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지구의 위성으로만 인식하고, 지구의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은 멀지 않아 보인다.
몇몇 지인들에게서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달을 판다고 했던가. 달을 어떻게 팔아? 달이 자기들 거야? 그게 효력이 있어?
당연히 달은 팔지 못하고, 달은 그들 것도 아니며, 효력도 없다. 그러나 달의 어느어느 부분을 누구누구에게 양도한다는 증서가 나돈다던가.

욕심은 끝도 없다.

이대로 가다간, 지구의 클론이길 거부한 달이 <월광천녀>
[각주:3]에서 처럼 지구의 곁을 떠나 머나먼 우주로 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구가 어떻게 됐던가?  


 



We're not programs, Gerty, We're people, understand?
우리는 프로그램이 아니야, 거티. 우리는 사람이야, 이해하겠어?

<더 문>을 보고 난 후 검색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 대사를 인상깊게 여긴다. 대사 자체의 쓸쓸함과 안타까움 때문이겠지만, 이 대사가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를 주고 받는 이들 때문이었다.

'클론' 샘은 '로봇' 거티에게 이해를 구한다. 나는 사람이야. 너도 이해하지?

이용하고 폐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영상으로만 존재하고, 명령만 내린다. 영화 속에서 샘 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맨 마지막에 죽어가는 샘을 폐기하기 위해 등장하는 구조단원 뿐이다.
샘과 이야기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다. '재부팅하면 된다.'라며 샘을 위해, 샘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리셋)하는 로봇 거티가 오히려 인간적이다. 아니, 인간적이지 않다, 라고 해야 하나.  


 


결국 하나의 샘은 또 다른 샘을 위해 달에 남았다. 그는 폐기될 것이다. 또 다른 샘은 지구로 향하고, 거기서 클론의 존재를 폭로한다. 그리고 루나 산업은 파산한다. 지구의 샘이 이후 어떤 삻을 살았는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거대한 질문 몇몇을 던져 놓고 부담스러워서 총총 결말을 맺어버린 듯해 개운치 않기는 하지만, 굳이 답을 내리려는 게 과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많은 SF영화가 '존재'에 대해 묻는다. 인간적인 클론, 로봇, 안드로이드 등을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 묻는다. 생각해보면 답하기도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그런 영화들을 보고 난 후 날 심란하게 만든 것은 다른 지점이었다.
대개의 영화들에서 기술 발전의 정점은 기계(또는 복제 인간)를 최대한 인간답게(또는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만드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기 위해 그들에게 인간의 감정과 기억을 심고,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게 한다.  
결코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존재들을,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고, 버려지는(폐기되는) 것의 아픔을 알게 하는 것.  
인간의 기술에 대한 맹신과 복종, 다른 존재에 대한 폭력적인 무심함이 무서웠다.  

어쩌면 그런 잔인함을 가져야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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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샘 벨 역을 맡은 샘 록웰은 참 연기를 잘 한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이런 저런 영화에 나왔다는데, 거의 모르는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거 참 낯익은 배우인데... 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미녀 삼총사> 2탄이던가... 거기서 착한 놈인줄 알았는데 나쁜 놈이던, 그래서 대박 놀라게 했던, 딱, 그 나쁜 놈이었다. 그 때도 참 연기 잘하더만....
2. 감독 던칸 존스는 데이비디 보위의 아들이란다.


       

                    
  1. 영화 속에 한글이 꽤 나온다. 달 기지 이름은 '사랑SARANG'이며, 달 채굴 사업을 하는 '루나' 기업은 한미공동합작회사라든가 그렇단다. 중간에는 한국말로 '안녕히 가세요.'라는 대사도 나온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박찬욱 감독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는데, '사랑'과 박찬욱, 처음에는 정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적절한 오마주인듯도), IT사업에 뛰어난 한국을 반영한 것이라고 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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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998년, 피터 위어 감독, 짐 캐리 주연. [본문으로]
                    
  3. 만화, 시미즈 레이코, 전 27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