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의 나라, 인도 <채식속으로 고! 고! 7편>
예전 인도에 갔을 때는 음식 때문에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2004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고나서 인도여행을 하는 일정을 짰었는데, 마음도 몸도 너무 힘들어서 결국 계획했던 한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조금 일찍 귀국하고 말았다. 그래도 첫 해외여행이었는데 안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서 내 살아생전에 다시 인도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에 WRI 국제회의가 인도에서 열린 것은 정말 예상 밖의 일! 많이 심란했지만, 결국 참가를 결정한 이후에는 6년 전의 트라우마를 벗고 오리라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주간 사무실을 비워야했고 통역도 없었기 때문에 미리 처리하고 준비해야하는 일들이 많아서 출발 직전까지 시간에 쫓기다보니 인도에서 잘 살아남기 위한 준비는 미처 할 겨를이 없었다. 어렵게 내린 결정인만큼 많이 얻어야하고 무언가 남겨야한다는 의무감으로 노트북과 영어자료는 잔뜩 챙겼지만 김이나 참치, 소주 같은 비상식량은 챙길 생각도 못했다는 걸 인도가는 비행기 안에서 깨달은 나는 또다시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지독한 안개 때문에 비행기는 4시간이나 연착되었고, 출발 전에 기내식까지 먹게되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승무원은 기내식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한참 전에 내게 와서 이름을 확인하고 의자 위에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미리 항공사 예약센터에 전화를 걸어 베지테리언 밀을 신청해둔 덕분에 소고기와 닭고기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장 먼저 기내식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신청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유제품과 계란, 뿌리채소의 포함여부 뿐만 아니라 종교에 따라(이슬람, 힌두교, 유대교) 여러 종류의 채식 식단과 건강식, 유아식도 있어서 미리 예약만 하면 원하는 특별기내식을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고기와 생선은 빼고 유제품과 계란은 포함된 채식 기내식(Western Vegetarian Meal)을 주문했다. 내가 주문한 것이지만 배려받는 기분이 들어 괜히 기분도 좋고, 채식기내식은 처음이라 기대감에 가득차서 접시를 받았다. 개인적인 평가를 해본다면 10점 만점에 8점. 구운야채와 토마토, 치즈에 바질 페스토까지 곁들인 샐러드는 최고였지만, 볶은 야채의 기름을 머금은 정체불명의 빵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일반 기내식보다는 훨씬 나으니 채식주의자가 아닌 분들도 꼭 드셔보길 추천하는 바이다. 참고로 인도항공은 기본적으로 채식기내식이 준비되어 있어서 며칠전 미리 전화해 신청할 필요가 없다.
인도는 여전히 내게 텃세를 부리며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계속되는 기상악화로 인해 비행기는 우리를 뭄바이가 아닌 델리에 내려주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고생을 하며 회의장까지 찾아가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야했다. 그래도 나이가 든만큼 내 입맛도 너그러워진건지 예전처럼 향신료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향신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인도는 정말 채식주의자들의 천국이었다. 모든 음식은 기본적으로 채식이고, 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메뉴판 한쪽에 별도로 주어져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이것저것 먹을 것도 많고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고기를 안먹는다고 하면 도대체 무얼 먹는거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살다가 채식의 나라에 오니 주류의 삶을 산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전히 인도에서도 고민과 망설임은 계속되었지만, 한국에서 하던 '이 메뉴에 고기가 들어갈까, 빼달라고 하면 빼줄 수 있을까' 식의 고민이 아니라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낯선 이름을 가진 이 수많은 채식 메뉴 중에서 무얼 먹어야 하는지, 어떤 맛과 향이 날지 등 차원이 다른 고민이었다.
탈리(우리식으로 하면 한정식)의 본고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자랏에서, 그것도 구자랏의 행정중심도시인 아메다바드 가장 좋고 비싼 식당에서 먹었던 탈리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고기가 들어있는지 의심해보지 않아도 되는 수십가지의 커리는 몇 종류 먹어보지도 못한게 아쉽기까지 하다. 야채가 가득한 두부스테이크는 일품요리로도 손색이 없었고, 푸쉬카르 시장 노점에서 팔던 즉석 베지버거와 베지난은 푸짐한 양에 맛도 훌륭해서 여러번 사먹다가 한국에 와서 창업하자는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병아리콩(Chickpea)을 으깨 향신료를 넣어 동그랗게 튀긴 콩 동그랑땡 팔라펠과 빵에 발라먹는 으깬 콩 후무스는 중동지역의 음식임에도 인도 북부에서도 먹을 수 있었다. 두부같은 인도식 치즈 빠니르를 야채와 함께 구운 빠니르 구이를 맥주와 먹으면 하루종일 먼지 때문에 답답해진 속이 뻥 뚤리는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로 고생을 많이 한 인도여행이었지만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음식이었다. 예전에는 날 가장 고생시켰던 음식이 이번여행의 즐거움으로 바뀐 것은 내가 변해서 그런걸까. 어쩌면 내가 채식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메뉴판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기를 빼달라고 주문해야하는 한국의 일상이지만 채식주의자들의 천국 인도를 다녀온 기분으로 기꺼이 즐겁게 채식을 하겠다. 쭉-
* 평화바닥 후원회원인 여옥님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http://www.withoutwar.org/)의 소식지 27호에 실려 있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bbs/zboard.php?id=www_letter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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