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자’들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을 상상하며
평화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모인 자리였다. 각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여성으로서 느꼈던 불편한 점, 차별의 시선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다. 모 단체 활동가에 따르면,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한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남다르고' 조직 내 위치가 불안정하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남성의 지위와 여성의 지위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은 비단 사회단체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니까, 뭐 그렇다 치자 싶었다. 다만 결혼 '못한' 여자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삼십대 중반, 고양이와 동거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게, 결혼을 하지 않은 것과 못 한 것이라는 시선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채식을 시작하면서도 그랬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며 '특별한' 시선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내 옆의 친구가 나를 옹호하며 꺼낸 이야기는 이랬다. 수하는 고기를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고. 채식의 '정당성'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입증을 통해 획득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옹호론은 식탁에서 꽤 설득력을 발휘하고는 했다. 가끔은 존경의 시선도 주어졌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다보면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몸이 된다. 안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의 경계에서, 의식적 노력과 의지의 문제가 몸에 배인 습속의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채식경험을 떠올리고 나서야 내가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임을 알았다. 마음 속 한 편에서 능력이 없어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라 항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현재의 결혼제도에 적응하거나 혹은 이와 협상하면서 행복한 삶을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결혼시장에서 상품가치는 떨어져, 확인해본바 없지만, 이미 예전에 퇴출됐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는, 나를 포함하여, 결혼하지 '못한' 여자들이 많이 있다. 어떤 이들에게 결혼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거나 혹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제도이자 문제적인 것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아직까지 한국은 이성애자의 결혼만이 허용되는 나라다. 굳이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틀 지워진 삶의 방식대로 살 수 없는, 결혼을 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이렇게 결혼하지 못한 이들,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의 존재는 어떤 종류의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채식하는 자, 비혼자가 만들어내는 불편함을 처리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특이한 것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이다. 고기를 먹을 수 없고, 결혼할 수 없는 그/녀들의 능력 없음이 문제인 것이지 '육식주의'와 결혼제도는 오늘도 내일도 안녕이다. 채식과 비혼을 바라보는 태도는 병역거부에서도 이어진다. 병역거부자들이 만들어내는 불편함은, 병역제도와 군대를 돌아보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군대에 갈 수 없는 개인의 능력없음을 문제삼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병역은 여전히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해진 궤도에서 외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은, 종종 혹은 누구에게는 계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인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나는 어떤 종류의 능력이 결핍된 자들이 늘어나는 사회를 꿈꾼다. '무능력자'라는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거나 잘 견뎌주기를 무엇보다 그로부터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란다. 다른 방식의 삶을 응원하고,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불편함과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사회, 무능력자와 겁쟁이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평화가 자란다.
* 평화바닥 회원인 수하님은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http://www.withoutwar.org/)의 소식지 27호에 실려 있습니다. http://www.withoutwar.org/bbs/zboard.php?id=www_letter
* http://peaceground.org/zeroboard/zboard.php?id=ground&no=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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